이들은 각자의 서글픈 사연과 드러내기 싫은 비밀을 애써 외면하고 때론 미화시킴으로써 삶의 의미를 작위적으로 만들며 살아간다. 근데 이런 작위적인 모습이 과연 소설 속 인물이기 때문일까? 나 또한 알게 모르게 비루한 나의 과거나 별 볼 일 없는 현재의 모습을 그럴싸하게 보기 좋게 포장하곤 한다.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책 좀 읽는다고 삶에 대해 처연한 척한다거나 아는 척을 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 인간관계로 괴로워하면 너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네가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고민할 필요 없다는 거다. 그래놓고 나는 화장실에서 버스 안에서 상대방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골몰한다. 책으로 보는 지식과 피부로 느끼는 감정의 골은 깊다. 좋은 대학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항상 열등의식이 있기에 대학 얘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 그저 어쩌다 운 좋게 지금의 회사를 다니게 됐지만 마치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만 풍길뿐이다. 순전히 제가 이 회사를 들어온 건 운에 의해서입니다.라고 구구절절 말하고 다닐 필요는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또 별 볼 일 없는 가정에서 지지리 궁상으로 자랐지만 가끔은 운에 의해 풍족한 시기도 있었다. 그럼 마치 그때가 나의 유년시절의 전부인 것처럼 포장한다. 또는 가난의 경험을 마치 대단한 훈장처럼 내세운다던가.
창피하고 부족하고 별 볼 일 없는 나에 대해 말하자면 더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 그만하고 싶다. 지지리 궁상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자아가 여기서 그만하라고 한다.
파면 팔수록 세상의 높은 기준들에는 가 닿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을 알면 알수록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그렇다.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들이 나로 하여금 비밀을 만들게 한다. 보편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나의 모습은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느낌이기에. 포장하는 것까진 좋다. 하지만 남을 깍아내려서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나에게도 장군이 엄마같이 남을 깍아내려서 내가 돋보이고자 할 때가 있고, 광진테라의 풍운아 아저씨처럼 환경이 좋지 못해 더 성장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 일쑤고, 미스리 언니처럼 남자 잘 만나 팔자를 피고 싶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도 가져봤다. 물론 그런 여자들을 겉으론 비웃으면서. 혜자이모처럼 가난의 굴레에 삶을 포기한 적도 있다. 이들의 모습은 결국 나의 모습이다.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좀 더 멋진 나로 보이기 위해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란 참으로 복잡 미묘하다. 잘나 보이고 싶지만 위로받고 싶고, 강해 보이고 싶지만 책임지긴 싫고,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만 손해 보긴 싫다.
새의 선물 속 진희처럼 다소 냉소적이지만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바라보는 나가 있어야만 삶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나를 관찰할 수 있다. 회피하고 싶은 현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