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미 Mar 05. 2024

헤어지지 못하는 할머니, 떠나가지 못하는 할아버지

  어제 티비를 보는데 뉴스에 고령의 할머니들이 모여서 한글을 배우는 모습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한글을 배우던지 컴퓨터를 배우던지 뭔가를 배우는 노인들을 보면 유독 할아버지 보단 할머니들이 많구나 느껴졌다. 그래서 옆자리의 그에게 참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할머니들이 큰가 봐? 저렇게 배우는 모임엔 할아버지 모습은 찾기가 어려운 거 같아.라고 말하니 그는 마치 자기가 그 할아버지라도 된 것인 양 말문이 막힌듯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잊었다. 그리곤 네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란 표정으로 예전엔 여자들이 배움의 기회가 없었잖아. 그러니 할머니들이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거지.라는 말 뒤엔 할아버지들이 상대적으로 배우신 분들이 많고 굳이 저렇게 모여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우는 게 부끄럽고 그래서 안 나오는 것일 뿐 그들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있을 거다라는 진한 여운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여자는 진보적이고 남자는 현실안주적이라는 편파적인 의견은 달지 말아 달란 눈빛과 함께.  

 문득 집 근처 상가의 오래된 현대슈퍼 앞에 있는 파란색 임시 테이블에는 항상 할아버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게 떠오른다. 슈퍼 앞에 달랑하나 있는 파라솔 테이블엔 어느 날은 삼삼오오 모여서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는 할아버지들이 있거나 어느 날은 혼자서 외로이 안주도 없이 강소주를 앞에 두고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혼잣말을 하는 할아버지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두 할아버지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술 없이 그 파라솔 앞을 차지한 적이 없다. 간혹 할아버지들 사이에 한 분의 할머니가 끼어있을 때도 있지만 그건 열 번 중의 한 번 정도의 빈도일까.

 그리고 그 옆을 지나서 출퇴근하는 무리들 중엔 유독 할머니들이 많다. 할머니들은 야무지게 책가방을 짊어지고 입을 앙다문 채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란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뒷짐을 진채 씩씩하게 출근한다. 다들 뭐가 그리 바쁘신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잠시만요 라는 처절한 외침도 무시하고 닫힘 버튼을 눌러버린다. 그녀들에겐 오늘 하루도 마치 빚진 하루처럼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인다.
 여자들에게 인생은 하루하루 풀어야 할 숙제들로 가득한 현실이고, 남자들에겐 냉혹한 현실 넘어 보이지 않는 우주공간을 부유해야만 살만한 게 인생인가 느껴진다.

숙제가 많다고 불행한 것도 꿈속을 헤맨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오늘 낮에 평소엔 용건이 없으면 카톡을 안 하던 그가 뜬금없이 기사를 공유했다.
  '80세에 컴퓨터과학과 학위 취득...'
 그리곤 이 한마디도 덧 붙였다.
 "할아버지도 공부하시네."

그도 이렇게 살아간다. 뒷북치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