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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무개 Dec 09. 2023

여우비 (2)

여름날의 아지랑이

   전근 이후 주연은 금융, 대출, 마트, 농자재 등 온갖 잡다한 업무에 손을 대며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적응기가 끝나갈 무렵 퇴근길에 옆자리 김수찬이 자신의 차를 정비소에 맡겨놨다며 읍내까지만 태워다 줄 수 없겠느냐 물어왔다. 주연은 어차피 가는 길이니 흔쾌히 그를 차에 태웠다.

   조수석에 앉은 김수찬은 일은 할만하냐, 주 계장은 좀 답답한 구석이 있어 피곤하다, 자신은 언제부터 근무했고, 집에 가면 뭘 하고 염병천병 오만가지 얘기를 주절대다 갑자기 주연에게 주말에는 뭐 하고 지내냐 물었다.

   “집에서 가만히 쉬기도 하고 친구 만나기도 하고 그렇죠 뭐. ”

   “남자친구요?”

   주연은 김수찬의 물음에 별생각 없이 동네친구들이라 답했다가 읍내에 다다를 때까지 이어진 침묵에 아차 싶었다.


   주말이 지나면서 김수찬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제멋대로 뻗친 지저분한 반곱슬머리는 같잖은 가르마파마가 되어있었고, 옷에서 나는 빨래 쉰내는 이름 모를 향수냄새 섞인 더 역한 쉰내로 바뀌어 있었다. 자재과 박 과장은 김수찬이 멋있어졌느니, 도시남자가 됐다느니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추켜올리다가 대뜸 주연과 그림체가 잘 어울린다는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였다. 그 말에 김수찬은 수줍어했고, 주연은 간신히 욕을 참아냈다.

   김수찬은 업무 중간중간 주연의 얼굴을 흘끔거렸고, 여자들은 달달한 걸 좋아하지 않냐며 시도 때도 없이 주연의 자리에 초콜릿과 같은 간식을 올려두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연애를 쉰 지 오래되어 외롭다는 것을 종종 어필했다.

   

   그리고 금요일 퇴근시간 김수찬은 주차장에 먼저 나와 느끼한 눈빛으로 주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연이 사는 세천시에 술약속이 있는데, 차를 가지고 갈 수 없으니 가는 길에 휘발유를 가득 넣어주겠다며 한 번만 더 얻어 타자는 것이었다.

   “주연 씨한테 꼭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그는 주저하는 주연의 반응에 말끝을 흐렸다. 고백이라도 할 참인가. 주연은 들렀다 갈 곳이 있어 미안하게 됐다고 정중히 거절했지만, 김수찬은 지지 않고 기다릴 테니 천천히 볼 일 보고 오라고 말했다.  

   “좀 오래 걸려서요.”

   “어딜 가시는데요?”

   “강춘묵 씨 댁이요. ”

   주연은 자기가 뱉어놓고도 이게 무슨 궤변인가 싶었다.

   “강춘묵 씨 댁요?”

   김수찬은 정말 신기한 말을 들은 양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에 상토 배달하고 깜빡한 영수증 전달해드려야 해서요. 그거 드리러 간다니까 저녁밥까지 먹고 가라 하시길래 승낙했어요.”

   주연은 마침 강춘묵 씨 댁에 영수증을 주지 않고 온 일이 생각났다.

   “그럼 기다리고 계셔서 그만.”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뚫고 강춘묵 씨 댁으로 차를 몰았다. 어느새 오미자차를 꿀떡꿀떡 넘기던 녹슨 철문 앞까지 와있었고, 영수증은 들고 나왔을 리 만무했다.

   “에라 모르겠다.”

   대문을 쾅쾅 두드리니 밤색의 낡은 우산을 쓴 노인이 걸어 나왔다. 이 무례한 상황에 도저히 눈을 맞추고 얘기할 수가 없어 땅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저.. 저기 그게.. 말을 늘이는데

   “마침 잘 왔어. 정구지 뜯어다가 전 부쳤는디 같이 먹으면 되겄네. ”

   늙은 노인은 지난번과 달리 가타부타 묻고 따지지도 않고 주연을 집안에 들였다.


   마당 안으로 들어가니 고소한 들기름 내가 풍겼다. 대청마루에 신문지가 다닥다닥 깔려있었고, 기름때가 낀 가스버너에 올려둔 낡은 프라이팬 위에서 부추전이 노릇하게 익고 있었다.

   “에이구 그새 탔네. ”

   노인은 한쪽면이 타버린 부추전을 뒤집으며 탄식했다.

   “잠깐 지둘려.”

   주연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부엌에 들어간 노인은 지난번 오미자차를 담아왔던 은쟁반보다 한 사이즈 더 큰 회색 쟁반에 이가 빠진 접시와 종종 썬 고추, 통깨와 기름을 두른 간장종지를 담아왔다.

   “아이고! 저분! ”

   저분이라니 누가 또 왔나 주연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노인은 부엌에서 젓가락 두 개를 가져왔다.

   “아… 젓가락..”

   주연은 사투리를 내뱉는 주름 진 늙은 노인이 문득 귀엽게 느껴졌다.


   “먹어 봐. 맛이 있을랑가 모르겄네.”

   “잘 먹겠습니다.”

   환대는 아닐지라도 자신을 내치거나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은 노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너무 맛있어요.”

   “다행이네. ”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고소한 부추천을 씹었다. 주연의 접시가 빌 새라 노인은 중간중간 바삭하게 부친 전을 계속 올려주었다. 노인은 주연이 자신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친 이유에 대해 끝까지 묻지 않았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대하는 그녀의 행동은 미리 약속된 만남처럼 자연스러웠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주연이었다.

   “할머니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

   그녀는 문득 늙은 노인의 이름이 궁금했다.

   ”내 이름? 유순옥. 이름은 왜 물어.”

   “아- 종종 뵐 건데 그래도 성함은 알고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별~ 늙은 할마시 이름이 뭐가 중요혀.”

   “이름인데 중요하죠. 이제 순옥 씨라고 불러야겠다. ”

   “에이, 낯 부끄럽게. ”

   “에? 이름 부르는데 왜 부끄러워요?”

   “에잇! 어릴 때나 동네 아짐들이 순옥아 순옥아 불렀지. 열여덟에 시집오고 누가 그 이름으로 불러줘? 강춘묵 씨 댁이니, 형수, 제수씨, 형님, 동생 하면서 우리 같은 여자들은 이름이 없었어. ”

   “그럼 이제부터 이름 부르면 되죠. 제 이름은 아시죠? 성은 주 씨고 이름은 연이라고 합니다. 순옥 씨! ”

   “허허허 참내! 싱겁기는. “

   노인은 어린 주연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연이! ”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 꾸깃꾸깃한 통장을 손에 든 순옥이 주연의 이름을 부르며 농협 안으로 들어왔다.

   ”순옥 씨! 오셨네요? “

   ”날도 더운디 고생이 많어. “

   한 시간 반마다 한 대씩 오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땀을 뻘뻘 쏟은 순옥이 에어컨 바람이 춥다며 카디건을 껴입은 주연의 더위를 걱정했다.

   “나 5만 원만 좀 뽑아줘. ”

   “5만 원은 어디다 쓰시게요? “

   “뭣 좀 사 갈라는디 시방 봉창(주머니)에 현찰이 하나도 없드라고. “

  주연에게 5만 원과 통장을 건네받은 순옥은 허리춤에 찬 자주색 힙색에 뭉툭한 손으로 꾸깃한 통장을 꾹꾹 집어넣고 지퍼를 꼭 잠갔다. 그러고는 예금창구 옆에 붙은 작은 하나로마트에 가서 정종 한 병과 쌀과자 한 봉지를 손에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허허 계산도 하는 겨?”

   어느새 계산대에 와 바코드를 찍는 주연을 보고 순옥이 웃었다.

   “네. 계산도 하고 돈도 뽑고 시키는 건 다 해요. ”

   ”갓난이라 이것저것 다 시키는구먼. 허허 “

   그녀는 검정봉투에 담은 술병과 쌀과자를 손에 들고 주연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순옥이 돌아간 뒤 옆자리 김수찬이 의자 바퀴를 쭉 끌어 주연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강춘묵 씨 할머니랑 무슨 사이예요?”

   “네?”

   “아니, 막 서로 이름 부르고 그러길래. ”

   “아- 그냥 이름 부르는 사이요. ”

   시큰둥한 주연의 반응에 김수찬은 입맛을 쩝 다시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퇴근시간이 되자 주연은 지난번의 일을 보답하고자 예금 가입 사은품으로 나온 행주, 수세미와 마트에서 산 병음료를 챙겨 순옥의 집으로 향했다. 대문간에 서서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순옥은 나오지 않았다.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는 듯했다.

   “아직 안 들어오셨나…”

   가져온 선물을 문 앞에 두고 가야 하나 망설이던 사이 뒤에서 주연의 이름이 불렸다.

   “연이!”

   “순옥 씨! 어딜 다녀오세요?”

   “손에 그건 뭐여?”

   “순옥 씨 선물이요~”

   “선물은 무신 놈의 선물. 싱겁긴. ”

   순옥이 손에 든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주색 힙색을 열어 열쇠꾸러미를 찾았다. 서너 개쯤 되는 열쇠 중 가장 기다란 것으로 대문을 열었다. 주연은 순옥을 따라 들어가 마룻바닥 한 귀퉁이에 가져온 선물을 올려두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

   “먹고 갈 텨?“

   순옥은 주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냄비에 물을 올렸다. 주연은 순옥이 시키지 않아도 마루 한가운데에 개다리소반을 펴두고 개수대로 가  행주를 물에 적셔 비틀어 짰다.

   “줘봐.”

   ”다 짰어요. “

   주연의 말에도 손바닥을 내밀며 행주를 달라하는 순옥. 주연이 짜낸 행주를 다시 비트니 물이 한 사발쯤 흘러내렸다.

   “아직 아가씨라 손아귀에 힘이 없구먼 뭘 허허”


   몇 분 뒤 순옥은 텃밭에서 따온 애호박을 종종 썰어 올린 잔치국수를 내왔다.

   ”시장이 반찬이여. 어서 먹어.”

   그녀는 선풍기를 틀어 주연이 있는 쪽으로 돌려주었다.

   “어딜 다녀오시는 거예요? 무겁게 정종을 가지고. ”

   “죽은 바깥양반한티. ”

   “산소에 다녀오셨어요? 오늘이 기일이에요?”

   “응. “

  ”자제분들 없이 혼자요? “

   “응. 안 멀어. 요 뒷산이여.”

   순옥이 목을 쭉 빼서 뒷동산을 향해 턱짓을 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데요?”

   주연은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순옥의 남편이 궁금했다.


   “고약한 술타배기였어. 그 좋아하는 술 먹다 잘 갔지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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