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무개 Dec 08. 2023

여우비 (1)

여름의 문턱에서

   세천시 지역농협 대출부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주연에게 대기발령이 났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서류를 다시 제출하셔야 해요. “

   주연은 지난 번 주택담보대출 상담을 받으러 온 고객에게 잘못된 서류를 안내하였음을 고객이 떠난 뒤에 깨달았다. 다급히 전화를 걸어 정중한 사과와 함께 필요서류를 다시 안내하였고 고객은 대충 알았다고 대답을 하더니, 기어이 처음 안내한 잘못된 서류를 가져왔다.

   “이거 떼어오라면서요?! “

   “고객님, 제가 처음에 잘못 말씀드린 것은 맞지만, 고객님께 유선상으로 다시 안내해 드렸습니다. ”

   “언제?! 난 그런 건 기억 안 나고, 여기 당신이 당신 손으로 체크해 준 거 떼왔다고! “

   “네 고객님, 제가 창구에서 잘못 안내해 드린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고객님께 바로 전화드려 정정하였고, 고객님께서도 알았다 하며 끊으셨습니다. 심지어 다른 서류들도 발급기간이 오래돼서 새로 떼어오셔야 해요.”

   “됐고 나는 여기 당신이 밑줄 친 거 다 떼왔으니까 당장 처리해! “

   주연은 해당 서류들로는 처리가 불가능하다고 반복하여 설명했다.

   “너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이게 사람을 몇 번을 왔다 갔다 하게 만들어?! 일을 그따위로 하고 말이야! 네가 떼어 와!”

   고객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지점장을 호출했다.

   “지점장 나와! 어디서 직원교육을 이따위로 시키고 있어!”


   지점장은 주연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고객에게 사과했지만, 그의 화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주연을 찾아와 분풀이를 해댔다. 그에게 서류 하나 다시 떼어 오는 것은 귀찮을지언정,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매일같이 항의방문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속되는 고객의 괴롭힘으로 주연에게 대기발령이 떨어졌다. 지점장이 사무실 구석의 테이블에 주연을 불러앉혔다.

   “일이 잠잠해질 동안만 전근 가 있어요. 원래 사회생활 하다 보면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은 일도 겪고 그런 거야. ”

   지점장이 바지 무릎께에 올라온 보풀을 떼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조합에서 주연 씨한테 실수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일이야. 감봉이나 권고사직 뭐 그런 징계 같은 거.. 하여튼 이 정도로 끝난 걸 감사해야 돼.”

   회사 차원에서 계약직 사원의 안위를 위하여 원거리 전근발령을 시혜해준다는 식의 말에 주연은 감격스러운 표정이라도 지어야 되나 싶었다.  


   무령군 감포읍 풍리 65번지, 소요시간 1시간 20분.

   “이 정도로 촌구석이라니…”

   주연은 단전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한숨을 토해내고 차 문을 달칵 열었다.

   “안녕하세요. 범산지점에서 전근 온 주임 주. 연.입니다.”

   이름을 한 자씩 힘주어 말하는 버릇은 어린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됐다. 40명 가까운 학우 중 두 글자 이름은 자신 밖에 없었고, 백이면 백 주연희로 알아먹거나 성은 뭐냐 물어대는 사람들 덕에 주연이요. 주연! 두 번씩 반복해서 말하는 수고가 필요했다. 그러다 주와 연에 힘주어 말함으로써 단번에 알아먹을 수 있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그날 오후 옆자리 김수찬 계장이 자재 창고로 주연을 불렀다.

   “강춘묵 씨 댁에 상토 좀 실어다 줘요.”

   “제가요?”

   주연은 뭐만 했다 하면 mz타령하는 전 지점 이 과장 탓에 mz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발령 당일 상토 포대를 배달하게 된 경위에 대해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인원도 없는데 주연 씨만 덜렁 두고 내가 다녀올 순 없잖아요. 박 과장님은 연차시고, 주 계장님은 외근 나가셔서 누구든 해야 돼. 싣는 건 내가 해줄 테니까, 트럭 몰 줄 알죠?”

   반말과 존댓말을 애매하게 섞어가며 일을 떠넘기는 김수찬은 끽해봐야 자신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였다.

   “죄송하지만 제가 2종면허라서요.”

   “아- 괜찮아요. 이거 오토야.”

   끝내 주연은 원예용 상토 스무 포대를 싣고 난생처음 1톤 트럭을 몰았다. 김수찬을 두고 씨부렁씨부렁 험한 말을 줄줄 내뱉다 문득 블랙박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입술을 앙 다물었다. 덜컹덜컹 거리는 시골길을 한참 내달리다가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녹슨 철문집 앞에 섰다.


   ‘강 춘 묵’

   도로명 주소가 적힌 파란색 현판 아래 집주인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파낸 낡은 원목 문패가 달려있었다. 대문 너머에는 군데군데 벽돌이 드러난 시멘트 벽채와 깨진 슬레이트기왓장, 먼지 쌓인 대청마루 위 말려둔 알 수 없는 나물이 보였다. 흙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요즘 보기 드문 지게와 물레, 빨래방망이가 한쪽으로 죽 늘어져 있었다.

   “계세요?!”

   문을 쾅쾅 두드리며 목청을 높이니 집 뒤편에서 빠글빠글 파마를 한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강춘묵 씨 댁이죠?”

   “야.”

   노인의 대답은 대단히 짧았다.

   “어르신, 상토 배달 왔어요.”

   “아가씨는 누구여? 첨 보는디.”

   눈가에 검버섯과 주름이 자글한 노인은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주연을 훑어보았다.

   “아 출산휴가 간 안미정 과장님 대신에 잠시 와있는 농협 직원입니다.”

   주연은 불미스러운 일로 유배 온 선비 같은 처지를 굳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외자네?”

   “네?”

   노인의 시선이 주연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향하고 있었다.

   “아- 네 주. 연.이라고 합니다. 어르신이 강춘묵 님이세요?”

   “강춘묵? 우리 아저씨.”

   “할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저거 내려야 되는데…”

   주연은 트럭에 실린 상토 포대를 가리켰다.

   “지지난해 갔어.”

   “어딜요?”

   “죽었다고~”

   “아이고 그러시구나.. 근데 왜 할아버님 이름을 계속 쓰시는 거예요?”

   “몰러.”

   “네?”

   “암시롱 뭐 어뗘. 다들 강춘묵 씨 댁 강춘묵 씨 댁 하는디. 얼른 와서 이거 내랴.”

   어느샌가 포대자루가 쌓인 트럭 앞까지 가 개수를 세고 있는 노인.

   “하나 둘 서이 너이…”

   “그거 꽤 무거운데…”

   “저 구루마나 갖고 와봐.”

   노인이 가리킨 곳에는 녹슨 끌차와 녹슨 호미, 녹슨 쟁기 온통 녹이 슨 것들 뿐이었다. 여름에 접어들었는 데도 집에는 마당에 듬성듬성 난 잡초를 제외하고 생기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주연은 늙은 노인과 상토 포대를 끌차에 켜켜이 쌓았다.

   “끌 수 있지?”

   “그럼요.”

   바람 빠진 바퀴를 꾸역꾸역 끌고 노인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니 집 뒷마당에 썩어가는 통나무로 지은 닭장과 흑색 멀칭비닐을 씌운 텃밭, 목을 푹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허리를 굽힌 채로 바람 빠진 끌차를 끌고 들어가 비닐하우스 한 귀퉁이에 상토 포대를 내려놓길 세 번을 반복했다. 초여름의 비닐하우스는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주연이 바람 빠진 끌차를 제자리에 두고 마당을 나와 열어젖힌 트럭 짐칸을 재정비하는 동안 노인은 요상한 꽃무늬가 그려진 은쟁반에 붉은 오미자차를 담아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오미자차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사이 은쟁반 위에 꼬깃한 돈이 올라와 있었다.

   “함 셔봐.”

   빈 유리컵을 내려두고 돈뭉치를 집어 들었다.

   “십이만사천 원 맞네요.”

   주연은 구겨진 만 원짜리 열두 장과 천 원짜리 네 장을 반 접어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여기 사람 아니지?”

   노인이 빤히 쳐다보더니 대뜸 물었다.

   “네 세천시에서 왔어요.”

   “결혼은 했어?”

   “네..? 아니요.”

   몇 살인디?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겨? 애인은? 갑자기 이어지는 물음에 대답을 하다 하다 빨리 가봐야 한다는 핑계로 간신히 차를 몰고 빠져나왔다.


   “아 맞다 영수증!”

   주연은 노인의 질문폭격에 영수증 주는 것을 깜빡했다.

   “아 씨, 몰라 다음 배달 때 가져다주든지 말든지.”

   속속들이 물어대는 노인의 무례함에 짜증이 났고, 돌아오는 길에 맡은 소거름냄새와 농약냄새, 풀냄새, 개밥쉰내… 도시에서는 맡을 수 없던 온갖 구린내에 코가 마비된 듯싶었다. 어쩌다 이 시골촌구석까지 와서 이러고 있나 갖은 욕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