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어머니를 나무 머리맡에 모신 뒤 2년이 지났다. 때가 되면 찾아가고, 날이 추워지거나 더워지면 찾아갔다. 그날은 날이 추워진 지 한참이나 지난 12월이었지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대로 나온 참이었다. 마침 일요일 아침이니 양평 가는 길도 그럭저럭 갈만 할 것이었다. 내 맘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머릿속에 엉켜있었다.
어머니의 나무는 꽤 높은 곳에 있어서 계단을 꽤 걸어 올라가야 한다. 숨이 가득 찰 무렵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남자가 나무 앞에 앉아 책을 작은 소리로 읽고 있었다. 몹시 추운 날인데 짧은 양말이 발목을 덮지 못해 시려 보였다. 잔뜩 웅크린 채로 뭘 저리도 열심히 읽고 있을까? 시선을 오래 두기엔 가파른 계단이다. 숨이 차서, 흡 하고 크게 들이쉬며 내처 올랐다. 일단 어머니께 인사부터 드려야 할 터였다.
술은 입에도 안 대던 분이라 술은 올리지 말고 좋아하시던 차를 올리자는 게 형의 생각이었다. 그 뒤로 올라오기 전 다원에 들러 차를 포장해서 올라오곤 했다. 차를 올리고 절도 올리고 나서야 한 숨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머릿속에 엉킨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으려나. 늘 하던 대로 멀리 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높은 나무를 고른 것은 어머니도 늘 이렇게 넓고 멀리 보시면 좋으리라 생각해서였는데 와서 앉아있으면 잘했다는 생각으로 늘 포근했다.
그런데 그날은 늘 가던 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고 그 남자의 웅크린 몸에 오래 머물렀다. 낮은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바람에 묻어 흘렀다. 책장을 넘기느라 소매 속애서 살짝 나온 손가락도 옹송그레 곱아보였다. 누구의 무덤 앞에 앉아 저리도 정성스럽게 책을 읽어드리고 있을까. 많아야 스무 살이나 되었을 얼굴을 하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책장은 너무 빠르지 않은 속도로 넘어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 남자와 책과 무덤에 시선을 두고 있으려니 한쪽에 먼저 와서 성묘하던 한 가족이 자리를 뜨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문득, 나는 언제 저렇게 정성껏 무엇을 했던가 싶었다. 사람에게도 저렇게 마음을 다해본 적이 어렴풋할 정도로 생각나질 않았다.
정성 들여 무언가를 한다는 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일이구나.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몇 달 전 여름이 오기 전 한참을 슬피 울던 아주머니도 생각났다. 먼저 간 자식을 부르며 통곡하던 소리에 한쪽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아 차마 시선을 두지 못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눈을 떼지 못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이 무덤을 남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이 가도 마음이 남으니 어쩌겠는가.
마음을 다해 공들여 한 장 한 장 읽어가던 남자가 책의 중간쯤에 책갈피를 두고는 책장을 덮었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 인가 보다. 아마 다음에 와서 마저 읽으려나. 무슨 책인지 궁금했지만 그에게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나도 떠나간 분에게 인사를 마저 하고 왜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길을 나섰는지 정리를 해봐야 했으니까.
양평에 다녀온 지 한 달쯤 지났고, 내일이면 새 해의 첫날이다. 여전히 정성 들여 무언가에 집중하던 모습이 영화의 한 컷처럼 남아 맴돈다.
나는 아마도 새해가 되면 온 정성을 다할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려나. 몸을 웅크릴지언정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처연했지만 빛났으니 나도 마음의 문을 더 열어봐야겠다. 새해를 앞두고 청년의 책 읽어주던 모습에 한참이나 생각이 머무르는 건 나에게도 변화가 오려는 신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