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토박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 중, 고, 대학교, 직장까지 서울에서 다녔다. 이런 내가 결혼 후 지방에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2007년 12월 결혼했고, 2009년 1월 출산했다. 결혼 후 신혼집은 일산이었는데 1년을 보낸 후 출산하면서 친정으로 들어가 2년을 보냈다. 아이가 태어날 때 남편은 빡빡한 일정의 대학원을 다녔어야 했고, 스물아홉에 아이를 낳고 혼자 아이 키우는 게 자신이 없어 친정집의 도움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친정살이도 끝이 났고 남편이 지방 발령을 받아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낯설었다. 아이는 세 살. 나는 서른둘.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참 어렸구나 싶다. 스물일곱에 친구들 중에서 두 번째로 결혼했고, 스물아홉에 첫 번째로 아이를 낳아서 모든 게 생소했다. 물어볼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고, 육아용품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새로 사야 했다. 그렇게 우리 세 식구는 부산에서 온전히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나의 첫 지방생활, 부산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산이어서 힘들었고, 부산이어서 좋았다. 부산에서 남편은 너무 바빴다. 평일은 새벽 6시쯤 출근해서 저녁 먹으러 집에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야근은 기본이고, 더 늦을 때는 밤 12시 전후에 퇴근했다. 나도 아이도 남편도 모두 힘들었던 시기다. 주말엔 하루는 사무실 다녀오고 하루는 쉬었는데 그 하루 쉬는 시간도 업무 전화가 계속 와서 힘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느라 더 힘들었을 것이다. 저녁 먹으러 왔다가 다시 나갈 때면 세 살인 아들은 아빠를 붙들고 가지 말라고 매달렸다. 어떤 날은 기다리다 지쳐 남편 사무실 근처에 가서 아이랑 공차기 놀이를 하면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아이를 빨리 재우고 혼자서 적적하게 티브이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이때 육아우울증이 생겼던 것 같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점차 나아질 수 있었다.
아이는 두 돌이 지나고부터 말을 너무 잘했다. 세 살, 네 살 호기심이 폭발하고 왕성해질 시기에다 말까지 너무 잘했는데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웠다. 게다가 몸으로 움직여줘야 하는 남자아이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너무 외로웠고, 남편은 바빴고, 주변은 낯설었고, 도움받을 곳이 없었다. 서울말을 쓰는 내게 주변사람들은 궁금해하면서도 경계하는 듯, 멀리하는 듯했고, 억양도 너무 강해서 가끔은 못 알아듣거나 나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요즘 MBTI로 따지면 I. 내향적이고 조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사귀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것 또한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우리 집은 약간 언덕에 있었다. 그때는 운전도 못할 때라서 아이랑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을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했는데 집에 올 때 아이가 잠들면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둘러업고 오느라 그때 허리가 많이 상했다. 어떤 날은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서 움직이기도 힘들었는데 아이 맡길 곳이 없어 병원도 못 가고 남편에게 울면서 전화한 적도 있었다. 내 사정이 딱했는지 남편 직장동료가 2시가 봐주어 겨우 한의원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주말에 허락된 시간이면 집에서 가까운 광안리해수욕장으로 나갔다. 바다. 바라만 봐도 너무 좋았다. 나를 숨 쉬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돗자리 펴놓고, 아이랑 모래놀이하고, 외식하고, 카페에도 가고, 또 바다 와서 놀고 어두워지면 집에 들어오고, 남편과 같이 외출하는 시간은 정말 꿀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새로운 장소에 가보는 걸 좋아했기에 지친 육아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독박육아라 굉장히 힘들었지만 관광지라서 새로운 장소에 가보는 즐거움에 힘든 육아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