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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06. 2024

구찌 격리소에서의 2주ㅡ1

일상이 멈춰버린 도시는 서로를 믿지 않았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몸부림은 이어지고 있었다.



격리소는 2층 건물로 두 동이 마주 보고 있었고 한 병실에 5명씩 수용되었다.

원래 군인들 숙소였던 곳인데 들은 얘기로, 이곳은 다른 격리소에 비해 시설면에서 좋은 편이었다.





보급품으로 일회용 샴푸와 빗, 수건 몇 개 , 휴지, 칫솔, 치약등이 제공되었고

방 제일 안쪽으로 배정받았다.

호텔에서 가져온 짐을 풀어 작은 서랍장 위에 먹을거리며 식수, 세면도구등을 정리해 두었다.


에어컨 시설은 없었지만 한 낮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운 더위가 없어서  나쁘지 않았다.

더한 더위 속에서도 군 막사 안에서 지냈던 내가 아니던가.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한 경험이지, 그럼~


두 노인과 중년 남자, 청년 한 명이 한 방에 있었다.

그들 중 발열과 기침이 있었던 할머니 한 사람을 제외하면, 스스로 앉아 밥을 먹고 빨래도 가능할 만큼

중상자는 없었다.

그들과 함께 내 격리소 생활은 시작되었다.




7월 15일

호텔에서의 생활은 격리되어 있는 걸 제하면 나쁘지 않았다.

직접 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생산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 비대면 업무는 낯설고 맞지 않는 작업이다.

두 손과 기계를 통하지 않고는 생산이 어려운.

아무리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게 시류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해내야 하는 게 우리 일이고

총괄하는 게 나의 업무이다.

ZALO앱을 통해 직원들에게 작업을 지시하고 바이어들과 화상 회의도 진행했다.

유럽 상황도 좋지 않아 전면 비대면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정상적으로 일이 될 리 만무하다.

발병 초기보다는 오더가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생산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베트남 공장들과 협업을 하는 원청 업체로서는 답답할 테지만  그들이 내 맘보다 답답할까!

정부의 입만 바라보며 질병의 확산이 진정되길  메일의 마지막 인사말로 박아두는 듯했다.


오전 일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면 베란다 쪽으로 나가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비염으로 고생하는 내겐 에어컨 바람보다 상쾌한 바깥공기가  좋은 컨디션을 만들어 주곤 했었으니......


나를 챙겨준다고 보내준 민간요법

생강과 설탕, 레몬그라스, 발포 비타민 정.

감기에 좋은 재료들인데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민간요법인 모양이었다.

같이 보내준 칼로 시간 날 때마다 생강을 다듬었다.

한 번도 해본 일 없던  생강 다듬기.


슬로 쿠커에 생강과 레몬그라스를 넣어 보글보글 끓였다.

온 방안에 퍼지는 생강향이 나쁘지 않다.


강제적인 멈춤 속에서도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내 일상의 틀을 깨지 않으려

의도적인 규칙을 만들어 생활했다.

가벼운 맨손체조는 기분전환도 되고 몸의 환기를 위해 필수였다.

간단한 체조와 팔 굽혀 펴기로 루틴을 만들었다.

식사 시간이면 복도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의자 위에 식판을 가져다 두는데

비닐에 싸여진 식판을 책상 위에 옮겨 온다.

평소 즐기지 않는 베트남 음식이 전부이지만

건네받은 김치와 김과 함께라면 12첩 반상이 부럽지 않다.

끓여둔 생강차도 진하게 우려내 후식으로 마셨다.

건강할 때 들여다보지도 않던 것들이 친근하게 여겨진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며 생강차를 마시곤 하는데 그 맛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평생 그때 먹었던 생강차는 맛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내 멈춘 시간과 함께 방안을 가득 메우던 생강차.

그 공기와 물은 더 이상은 없을 테니......


아내가  챙겨주던 식사와 차 한잔을 무심히 받아 왔는데

새삼스럽게 음식이 주는 귀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며 챙겨 왔던 것들이 모조리 무시되며

지금  주어지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게 되는 순간들.

가치를 두며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시간들을 보내며

그럼에도 , 우리의 일상은 지켜지고 있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루 세 번의 식사가 끝나면 어느새 하늘은 밝은 기운을  어둠에 양보하는 시간이 된다.

더디지만 이어지는 생계를 위한 몸부림에 감사해했고

작은 목소리지만 이 일상이 어서 끝나기를 기도했다.



방안에 있으니 한기가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 따가운 햇살을 마주하자 한기가 조금 가셨다.

그저 감기일 수도......

저녁이 되자 발열이 시작됐다. 감기에도 열은 나잖아..

확실하지 않아 스스로 부정하면서도

만의 하나인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재수가 없으려니,,, 양성도 아닌 양성 환자는 양성자들에게 둘러싸여 몇 밤을 같이 보냈다.

그 시간을 무시할 수 없으니 `난 아니란 생각`은  금물이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그 사이 한인사회에서는 증상이 심한 감염자들의  본국 수송이 단연 화제였다.

대사관에 통보 없이 화장을 한 사건 이후로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제대로 된 치료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확진자들 중에 누구는 증세가 심해 사경을 헤맨다는 둥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던 60대 환자분을 보건소 직원들이 데리러 왔는데 몸을 못 가눈다는 둥,

흉흉한 사진들이 돌아다니고 , 단톡을 울려대는 겁나는 소문들.

별다른 치료 없이 타이레놀이나 몇몇의 약으로 버티고 있는 환자들에겐 공포의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또, 증상이 중한 환자들 가운데 한국으로 호송된 일이 있었는데

에어앰뷸런스를 띄우려면 1억의 비용이 든다고 했다.

인원이 추가되면 조금씩 줄어들긴 하지만 상당한 비용이다.

한국으로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들에겐 돈은 부질없는 선택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돈 없으면 그저 처분만 기다리라는 건가!


이런저런 뒤숭숭한 얘기를 들은 터라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발열과 한기.

그 뒤엔 뭐가 남았을까!


나도 무서웠다.

병원에 갇혀 있을 때는 그래도 세가 없어서 마음을 내려놓았던 반면

지금은 뭔가 다른 것 같아서.......

전에 없던 병으로 세계가 몸부림치는 중이어서.


발열 후 5일째 되던 날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뭔가 다르다.

냄새가 없어졌다.

20일 확진 판정이 나왔다.

마침내.


호텔 투숙 5일 후였다.


그날 저녁 차를 타고 구찌 격리소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연락을 해줘야했다.

어머니 병간호 차  아내는 5월에 한국으로 가 있었던 상황이어서

어머니나 아내  두 사람에게 걱정이 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코로나 걸렸단다.

내가 지금 구찌 수용소로 가야 하는데

가서 정리가 되고 나면 연락을 할게.

발열이 있었고 지금 증세는 없는데 후각은 없어진 것 같아.``

준비한 말을 다 쏟아내었다. 조심스럽고 순화된 말로.

증세가 나빠지면 자기가 에어 앰뷸런스 불러줄 테니 절대 증세를 숨기지 말고

바로 알려달라고 한다.

울음 섞인 말과 함께.

아내도 단톡으로 호찌민 상황을 거의 다 듣고 있었던 터라

증상이 나빠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너무 두려웠을 것이다.

유튜브의 자극적인 영상에서 보던 낙후된 치료 시설, 비위생적인 주변환경 등,

그렇게 불필요한 소문들은 서로의 불안감만 키워주었다.



숨죽이며 한참을 아내와 통화를 이어갔다. 어머니께 들켜서는 안 될 테니.

홀로 걱정을 안고 있는 아내가 안쓰러웠다.

나도 나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 그저 말로 달래줄 뿐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이어질 코로나 환자로서의 생활이 두려웠다.

나도 코로나는 처음이라......


호텔에 늘어놓았던 짐들을 모두 정리해 호송차에 실었다.

2시간 반을 달려 격리소에 도착한  시각은 8시 반이 넘어있었다.


그날의 그 어둠처럼 앞으로의 내 생활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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