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춘자

봄날 같은 인생을 살라고

by Marisol

오춘자.


4월, 봄에 태어난 여자아이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셨다.

1945년 그 당시는 아직 일본강점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일본 여자아이들처럼 이름 끝에 ‘子’를 붙였다.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봄날처럼 따뜻하고 온화하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넉살 좋게 웃으며 그녀의 불만을 잠재웠다.


아버지 뜻대로 그녀의 인생이 꽃 향기 가득하고 살랑거리는 연두 빛 봄바람을 맞으며, 매일매일 소풍 가는 마음으로 설레면서 한평생 살아갈 수 있다면야 그저 춘자, 그 이름처럼 살아보리라.

사람팔자 이름에 달렸다고 하지 않은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포목점을 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물자가 부족한 때에 넉살대왕 아버지는 호방한 성격 덕분에 장사를 잘하셨다.

두 살 아래 남동생 명석이와 춘자는 그 어려운 시절에도 하얀 쌀밥을 먹으며 남 부럽지 않게 살았다.

봄날처럼.


그렇게 계속 봄날 같은 인생일 줄 알았다.






춘자 나이또래 여자애들은 스물이 되기 전에 하나둘씩 시집을 갔다.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깨 웃음으로 떠들어댔던 친구들이 신랑들을 따라 떠나고 나니 동네가 적막해진 듯했다.


어머니는 춘자가 다른 여자애들보다 키가 커서 총각들이 안 데려간다고 푸념했다. 얼굴이 크고 네모진 말상인 것도 문제가 될 테다.


사실 춘자는 남동생보다 키가 더 컸다. 여자가 키가 멀때 같이 크면 야무지게 보이지 않는다고 유행하는 신식 구두도 못 신게 했다. 옷 해 입힐 때도 옷감도 많이 든다나…


춘자 22살.

동네에서 시집도 못 간 노처녀라고 수군거리며 흉보는 소리를 어머니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담장 너머 들었다.


키가 커서 이웃집 담장 위로 불쑥 튀어나 보이는 춘자의 어깨부터 머리를 흘낏 쳐다본 한 아줌마가 주책스레 계속 떠들어대던 옆 사람을 쿡쿡 찔러댔다. 순간 춘자얘기로 시끌벅적하던 이웃집 평상이 초상집마냥 조용해졌다.

젠장, 내 키가 큰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쳇!

똥구덩이에 모인 시끄러운 똥파리들이라니...

두툼한 눈두덩이에 쌍꺼풀이 생기도록 눈을 위로 치켜뜨며 입술을 삐뚜름하게 일그러뜨렸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동네 어귀에 그녀의 기다란 그림자가 어기적거렸다.




이제 몇 밤만 자고 나면 나이 한 살 더 먹게 생겼으니 이를 어쩌냐고 누가 들으라고 하는 건지 아닌지 아침부터 한숨을 쉬면서 어머니는 부엌 아궁이에 마른 나뭇가지를 쑤셔 넣고 있었다.


먹성 좋은 춘자는 오늘 만큼은 밥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아침밥상을 차리기 전에 집을 나왔다.

먼저 시집간 친구들은 잘 살고 있을까, 벌써 애엄마가 되어 있을까, 생각하면서 동구 밖까지 크게 세 바퀴나 돌다가 어머니가 밥상을 치웠을 즈음에 집으로 돌아갔다.


대청마루에서 아버지가 옆 동네 어르신과 같이 말씀 중이셨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뭔가 좋은 일이겠네 하고 어머니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다과상을 차리는 동안 춘자는 슬그머니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가시고 아버지가 안방에서 우물이 있는 마당까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부르셨다.


우리 춘자 이제야 시집가는구나~! 하면서 광대뼈에 뭉친 얼굴주름이 크게 세 가닥으로 갈라질 정도로 웃는 모습이 하회 탈하고 똑같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해가 바뀌고 겨울인데도 금빛 태양이 쏟아질 것 같이 맑은 날, 하얀 셔츠에 위아래 감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때 왔던 어르신 뒤로 대문 문지방을 넘어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오더니 두 발에 힘을 주고 떡하니 멈춰 섰다.

왼쪽으로 몸을 약간 뒤틀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얼굴을 돌리며 집안 공기를 맡으면서 심호흡을 하는 듯 집을 둘러보는 남자의 옆얼굴을 도둑질하듯 몰래 훔쳐본 춘자는 가슴이 콩딱거리면서 얼굴이 화끈해진 것을 느꼈다.


춘자보다 약간 키가 더 큰 듯한, 훤칠한 남자의 어깨에 황금색 햇빛이 올라앉아 건강한 풍채와 얼굴이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내 신랑감인가?


한눈에 그렇게 확신했다.


이름처럼, 봄날 같은 인생이 이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춘자는 아버지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사하다고 억지로 웃음을 숨기려고 입술을 씰룩이며 아무도 안 들리게 입속으로 읇조렸다.


봄날처럼 살게요.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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