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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쌤 Nov 10. 2024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피터 브뢰겔


브뢰겔, Lanscape with the fall of Icarus(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1558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크레타왕 미노스는 왕비 파시파에가 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낳자, 괴물을 가둬 둘 미궁 라비린트(Labyrint)를 다이달로스에게 만들게 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루스를 처치하고 딸 아리아드네와 함께 야반도주하자 화가 폭발한 미노스왕은 아리아드네를 도운 다이달로스를 붙잡아 빈 미궁 라비린트에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가두어버린다.  


그러나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 부자는 미궁에서 도망치기 위해 주변을 날아다니던 새들로부터 떨어진 깃털과 미궁 곳곳에서 찾은 벌집에서 얻은 밀랍으로 사람이 날 수 있을 정도로 큰 날개를 만들어 몸에 붙이고는 함께 하늘로 날아올라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카루스는 하늘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은 채 너무 높이 날아올랐고, 결국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에게해에 추락해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태양(천상)에 다가가려는 욕심 하나 때문에 헬리오스와 포세이돈에게 천벌을 받은 셈이다. 홀로 지상에 착륙한 다이달로스는 아들의 시신을 건져 올리고는 크게 슬퍼하며 섬에 묻었는데, 나중에 이 섬은 이카루스의 이름을 따서 이카리아 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16세기 플랑드르 지방의 풍속화로 유명한 화가 브뢰겔은 이러한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 이야기를 화폭에 담았다. 자신의 날개가 밀랍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잊고 태양 가까이까지 높이 날았다가 그만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는 인간의 한계와 운명에 관한 슬픈 이야기다.     




제목은 이카루스가 주인공인데 이 비극의 주인공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림 일부 확대


얼핏 보면 그는 대체 어디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오른쪽 배아래 막 바다에 빠져 발버둥 치는 두 다리만 겨우 보일 뿐이다. 그것도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 범선 아래편 구석에 보일까 말까 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부와 목동은 이카루스의 추락과 죽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묵묵히 각자 자기 일을 행할 뿐이다. 가까이 낚시꾼도 고기 잡는 일에만 몰두한다. 왜 이들은 이카루스의 추락에 무관심한 것일까?


이카루스의 신화는 당시 속담집에 자만과 야심에서 비롯되는 어리석은 행동을 보여주는 예로 자주 포함되어 있었다. 브뢰겔은 이와 같은 교훈을 그림을 통해 독창적인 방식으로 전달했다. 이카루스의 비행은 기적이었겠지만, 인간사의 큰 물결 속에 겨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킬 뿐이다. 이카루스가 바다에 빠진 것도 모른 채, 농부와 양치기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배는 유유히 지나가고 있다. 그림의 제목을 모르는 무심한 관람자는 이들과 비슷하게, 그림의 오른쪽 아래 한구석에서 바다에 빠지고 있는 이카루스의 다리를 무심히 지나치기 쉽다. 사람이 죽어가도 농부는 쟁기질을 멈추지 않고, 이카루스만큼 부주의한 양치기는 이리저리 흩어져 돌아다니는 양들은 돌보지 않은 채 유유자적하고 있다.


이 신화에서 비롯된 '이카루스의 날개'는 미지의 세계(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동경 그리고 동시에 한계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이카루스의 죽음이 상징하는 '거창한 비극이나 아름다운 모험'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한 근면 성실함이나 때론 유유자적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만이 강조되는 듯하다. 아마도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을 잊은 채 신을 거역하는 행위를 경계하라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는 16세기 당시의 종교적 인식이 내재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그림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이카루스는 과연 태양 가까이 높이 날아 보기는 한 것일까? 미지의 세계, 꿈을 향한 도전은 정말 무모하기만 한 것일까? 이 그림에서는 그의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녹일 만큼 뜨겁고 강렬한 태양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또다른 사람의 죽음에 너무 무관심한 사람들.

한 인간이 죽어가면서도 저렇게 소외받아도 되는 것인가?



그림출처 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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