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는 돈을 쓰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는
감사일기를 함께 써보자고 제안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빨간색 일기장을 하나 선물했다.
쨍한 색감이 유독 눈에 띄는 노트였다.
“엄마, 이건 엄마만의 일기장이야.”
그렇게 시작된 엄마의 ‘빨간 일기장’ 그 속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엄마의 하루하루가 감정이 그리고 삶이 조용히 담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늘 부지런함을 강조하셨다. “잠은 죽어서 실컷 자면 돼.”
그 말은 엄마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듯했다.
그 덕분에 나도 주말에 게으름을 피우며 하루를 허투루 보내는 일이 없다.
틈나는 대로 궁금한 것을 배우고, 그것이 좋으면 직원들과 나누려고 노력했다.
예전엔 그게 아까웠다. ‘내 시간과 돈을 들여 배운 걸 왜 남에게 알려줘?
어차피 나랑 얼마나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인데...’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스스로 아는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의 그런 마음이 오히려 나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그런데 문득 돌아서 생각해 보니, 정작 엄마와는 좋은 것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아마 엄마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어색하고, 어딘가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부모님은 늘 ‘나보다 많이 아는 존재’라고만 여겼기에 내가 먼저 무언가를 알려주는 상황은 낯설고 어색했다..
그런 내 마음을 바꿔놓은 건, 어느 날 엄마의 한마디였다.
퇴근하고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다른 건 괜찮은데... 필체가 내가 제일 별로야.” 생전 처음 경로당 총무를 맡은 엄마는
회원들을 위해 식단을 정리하고 공지를 적고 서류를 챙기며 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적은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다.
엄마도 배우고 싶어 하시는구나.
그래서 제안했다. “우리 1일 1 프로젝트 해볼래?
엄마는 감사일기 쓰고 색칠하기, 나는 젠탱글이나 캘리 쓰기!”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작은 습관이 시작되었다.
퇴근 후 거실에 나란히 앉아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점점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처음엔 어색해하셨다.
“감사한 게 있어야 쓰지…”
하지만 며칠만 지나도 사소한 일에도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하셨다.
감사의 언어로 채워진 하루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바뀌어갔다.
초저녁 잠이 많은 엄마는 가끔 감사일기를 잊기도 하셨다.
“엄마, 어제 일기 안 썼지? 지금이라도 써~” 그러면 엄마는 웃으며 대답하신다.
“아냐,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썼어.” 그 말에 얼마나 뿌듯함이 밀려오는지....
어느 날, 우연히 엄마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그날의 기록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색칠만 했다. 이렇게 색칠이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엄마는 늘 ‘부지런함’을 말했지만 어쩌면 가만히 있는다는 게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배우고 기록하고 움직이는 것이 엄마의 방식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를 그냥 ‘부지런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엄마는 어쩌면 나보다 더
배우고 성장하고 하루를 의미 있게 채우고 싶어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자주 생각한다.
‘엄마는 무엇을 좋아하실까?’
좋아하는 음식, 취미, 사소한 습관조차도 다시 묻고 싶어진다.
그 질문은 어쩌면, 내가 엄마를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엄마와 함께 거실 탁자에 앉아 색칠을 하고 글씨를 쓴다.
이 평범한 순간들이 언젠가는 기억 속으로 스며들겠지만,
엄마와 나란히 앉아 보낸 시간만큼은
내 안에 오래도록 따뜻한 온기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올 때 나는 이 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기에,
엄마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그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 무라카미 하루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