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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림 Nov 01. 2024

나를 지키는 루틴의 마법

루틴은 강박이 아닙니다.


'그냥 다 포기할래..'


대차게 5년의 유학생활을 논문 쓰다 터져버린 번아웃으로 날리려던 그때, 나는 코스 리더 Nick의 조언대로 교내 Student Services를 통해 카운셀링을 받았다.


나의 등록금이 이런 곳에도 쓰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어로 공부하고 발표하고 논문도 썼지만, 내 깊숙한 이야기를 낱낱이 꺼내기엔 언어의 벽이 존재했다. 그래도 최대한 나의 감정과 상황을 설명하며 세션을 이어나갔다. GP에 가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먹어보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약을 먹고 싶지 않았다. 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받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우울증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싫어서였을까.


그래서 약은 일단 미뤄두고, 새롭게 꾸준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자는 조언을 실행해보자고 생각했다. 매일 몸이 무겁고 침대에 누워 스며들어 증발해버리고 싶었지만, 운동을 하면 약을 안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겨우 일어나보았다. 사람은 우울하거나 무기력해지면 씻는 걸 먼저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씻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꼬질꼬질하게 나가도 서로 신경 쓰지 않는 쿨한 런더너들이라 그냥 나갈까 하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일단 씻었다. 밖으로 나가보았다. 집 근처 내가 좋아하는 Hampstead Heath에 가서 걸었다.


내가 사랑한 Hampstead Heath. 자연 속 생명체 중 하나가 된 느낌이 드는 곳.


아, 좋다. 내가 좋아하는 온도의 공기, 초록초록한 길, 맞은편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주인과 걷는 리트리버,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 소리. 밖으로 나오니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게 감사했다.


그날부터 나는 최대한 몸을 밖으로 끌고 나가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정해진 시간에 걷게 되었고, 그게 내 루틴이 되었다. 나의 쓰다 만 논문을 다시 붙잡고 겨우겨우 끝낸 그 기간 동안 나는 정해진 시간마다 공원을 걸었다.


그렇게 생긴 나의 루틴에 나를 위한 루틴들이 조금씩 추가되었다. 영양제 챙겨 먹기,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기, 주말엔 카페 가서 사람 구경하기... 이 루틴들이 모여 내 삶이 조금씩 건강해지고 또 풍요로워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영국에서 꽤나 어렵다는 취업비자를 받고, 런던의 한 제품 전략 컨설턴시에 다니고 있었다. 프리랜서로 시작한 내가 계약직으로 전환되고, 회사에 없던 '디자이너' 포지션을 따로 만들어 정규직까지 최종 오퍼를 받으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나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몫의 두 배는 넘게 해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에게 영국에서의 삶은 생존 그 자체였다. 취업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실패자가 될 거라 생각했다. 남들에겐 관대했지만 나 자신에겐 가혹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한 만큼 뿌듯한 성과였다.


정규직으로 입사 후, 회사에서의 첫 Away day.
Away day에서 느낀 점 중, 나를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피드백과 합류에 대한 기대를 표해준 나의 동료들




그래서 그다음을 노렸다. 승진도 하고, 주니어도 코칭하고, 연봉도 올리고. 그러기 위해 나는 프로젝트에 할당된 시간보다 빨리 끝내고 더 많은 작업물을 해냈다. 처음 해보는 건 독학해서 해냈다. (그래서 인쇄부터 애니메이션까지 어느 정도는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난 어떻게 되었을까?



맞다. 또 왔다. 번아웃.


이번엔 몸이 먼저 아프기 시작했다. 장시간 한 자리에 앉아 화장실도 안 가고 물도 적게 마시고 데드라인과 퀄리티에만 집중했으니까. 그렇게 나의 목, 어깨, 허리, 골반, 손목이 하나씩 고장이 났고, 세션당 60파운드를 내고 3분 만에 치료가 끝나는 카이로프랙틱을 매주 받았다. 그렇지만 손목은 치료받지 못해서 아예 쓰지 못할 정도로 고장 나 2주간 병가를 내고 쉬게 되었다. 자책이 컸다. 하나밖에 없는 디자이너가 아프다니. 클라이언트와의 약속은 어떡하지... 하지만 유럽은 병가에 관대하다. 그래서 나 빼고 모두 프로젝트보다는 나를 걱정해줬다.


이렇게 살 순 없어서 카이로프랙틱에 들어가는 돈을 PT에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을 나는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회사 동료가 오늘 퇴근하고 뭐해? 했을 때 '등'이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멋진 몸매를 가진 건 아니지만, 매주 4일 이상 운동을 하는 꾸준함과 통증 없는 목, 어깨, 허리, 골반, 손목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마음과 아침마다 운동 후 나오는 아드레날린은 덤이다.


수많은 운동 인증샷. 인스타 스토리에 자주 올리는 편인데, 그 덕에 운동을 시작한 지인이 10명이 넘는다.


그렇게 꾸준함이 쌓여, 다양한 루틴이 나를 살리고 있다.  

아침에 운동하는 것

각종 영양제를 잘 챙겨 먹는 것

식사 후 10분 이상 산책하는 것

밥 먹으면 바로 설거지하는 것

매주 일요일, 화장실 청소 딥클리닝하는 것

잠자기 전, 핸드폰은 거실에 두고 남편과 수다를 떨다 자는 것


그리고 이제는 정해진 시간에 맑은 머리로 글을 쓰고 싶어 그에 맞는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나의 루틴 만들기 팁은 조금 느슨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 어제 이거 안 했네! 실패다!"가 아니라 "음, 그럼 오늘 하면 되지~" 하고 강박이 아닌 여유 있는 마음으로 루틴을 만들면 오히려 그 과정이 즐겁게 느껴진다.






런던의 봄

건강한 루틴을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제일 갖고 싶고 오래 유지하고 싶은 루틴 단 하나만 정해서 한 달만 해보길 바란다.

한 번에 여러 개를 시도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단 하나에만 집중하면 금방 습관이 된다.


그리고 그 루틴 위에 또 새로운 루틴을 얹어 한 달만 더 시도해보면 생각보다 쉽게 쌓일 것이다.
나를 지켜주는 루틴이라는 성벽이.


그리고 꼭 느껴보길 바란다. 일상의 루틴이 나를 지켜주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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