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_죽음에도 귀천이 있을까
아무리 부자라도, 죽을 때는 결국 무엇 하나 손에 쥐지 못하고 간다는 말이 있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죽고 나서, 나는 죽음의 귀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가령 자살하는 유명인들이 있다면. 그들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때로는 사회 문제까지 언급되고는 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세상을 변화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28.3명이다. 10만 명 당 28.3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소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 시간에 40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내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고인이 살아온 행적에 따라 슬퍼하는 사람의 수도 달라진다. 하지만, 못된 생각인 것을 알지만, 유명인의 죽음을 볼 때마다 죽음에도 귀천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자살은 아니지만, 일찍이 죽음을 맞이한 가족이 한 명 더 있다. 그는 현재 우리 엄마 옆에 묻혀있다. 어느 날, 이모가 사진 두 장을 보냈다. 고인의 친구들이 명절을 맞아 찾아온 모양이었다. 화려한 꽃들과 생전에 좋아하던 커피, 사진 등등... 형형색색의 비석 옆에 텅텅 비어 있는 엄마의 묘지는, 지나칠 정도로 추레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꽃다발 두 개를 사들고 추모관에 갔다. 옆은 여전히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내 앞엔 녹색 잔디에 엄마의 이름과 생년이 적힌 작은 비석 하나.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나름 화려하게 꾸민 꽃다발을 엄마의 비석 옆에 놓았다. 물론 가족이므로, 옆에 놓인 수많은 꽃들에도 나의 꽃다발 하나를 두었다. 분했다. 왜 엄마의 묘에는 명절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인가.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갔나. 못된 생각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나는 못된 사람이니까.
계속 눈물이 났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죽음에도 귀천이 있을까, 죽음에도 귀천이 있을까, 평생 답하지 못할 질문을 속으로 되뇌는 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