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눈높이를 하였다. 그때 당시 학습지가 열풍이라 매주 2~3회 선생님이 집으로 와서 문제집을 주고 같이 풀어주고는 하셨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는 다음 수업까지 풀어야 할 범위를 정해주고 가셨다. 당시 수학과 영어를 했었는데,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숙제를 시작하였다.
이런 학습지는 보통 정답의 빈칸을 채우는 유형이다. 식의 정답을 찾던지, 식의 중간에 구멍이 난 빈칸을 맞게 채우는 형태로 당시, 나는 빈칸을 채워 넣는 것에 대한 희열을 느꼈다. 빈칸에 올바른 것을 채울 때, 그리고 그게 정답으로 맞았을 때 나는 큰 만족을 얻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채점했을 때 빨간 색연필로 누구보다 더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나하나 쌓여가는 동그라미가 나에게는 보람이였고, 증명이었고, 저금통에 동전이 쌓이는 거처럼 차곡차곡 모으는 자존감의 저축이었다. 빈칸을 맞고 올바른 것을 채우는 행위는 당연하면서도 해야할 미션이었다.
나의 이런 빈칸 채우기 본능은 성인이 돼서도 지속되었다.
대학에 들어간 스무 살 때는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 왜, 세상은 불공정한가, 사회에 숭덩숭덩 구멍 뚫린 빈칸을 채우면 사회문제의 해결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각종 노동 현장에서 시위도 하였고, 올바름이 필요하다는 곳에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20대였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첫 회사는 빈칸을 만드는 곳이었다. 수능 모의고사, 고등학교 문제집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던 빈칸을 만들었다. 내가 만든 문제를 통해 아이들이 수능을 준비하고, 자신의 학습 능력을 키울거야. 나의 이러한 일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큰 도움으로 다가갈 거야. 이것은 세상을 바꾸는 빈칸이야! 물론 속으로는, 사교육과 수능제도에 대한 불편함은 있었지만, 바꾸는 그것보다 필요한 이들에게 좋은 빈칸을 제공해 준다는 성취감이 컸다. 아니, 성취감으로 버텼다.
그러나 나이가 한 살 두 살 넘어갈수록, 빈칸을 채운다는 것은 어려웠다.
예전에는 눈에 보이던 답들이 이젠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 고민해서 답을 쓰려고 하면, 다른 변수, 조건들이 눈에 보인다. 그러면서 결국 이게 정답 맞아? 이렇게 채우는 게 정답이야?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냥 단순하게 선과 악, 진실과 거짓으로 보였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복잡하고 너무 많은 변수들로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문제를 풀기 좋아했던 아이는, 이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빈칸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는 아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빈칸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었다. 채울 수 없느니, 그냥 빈칸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던, 요즘 나는 다시금 빈칸으로 남겨있는 문제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빈 칸을 채운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풀이 과정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가? 조금 단순화 시켜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시험을 잘 보는 방법은 결국 출제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려워 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자. 출제자인 ‘나’ 자신을 파악하자. 그리고 출제자가 어떤 의도로 문제를 냈는지, 어디에 빈칸을 만들었는지 알아보자. 그러면 그 빈칸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지 보인다.
요즘의 ‘나’는 인생의 빈칸에 어떤 것들로 채워서 정답을 만들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