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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짝친구 부라더의 사망

퇴로는 없다

by 해우소 Mar 25. 2025

나와 동고동락해온 미싱이 드디어 맛이 갔습니다. 단 한 번의 수리도 없이 수십 년을 버틴 것이 대단하지요. 이 나라 저나라 떠돌며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이런 것 저런 것 함께 만들던, 나에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친구. 최근 급격히 몸이 불은 제가 옛날 바지를 하나 고쳐입으려다 사달을 내고 말았습니다. 영감님이 막 떠오르는데 갑자기 급브레이크가 걸린 데다가 뭔가 한 시절을 끝내 정리한 것 같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옛날엔 왜 그렇게 작은 바지를 입었을까요? 도대체 얼마나 많이 무리했던걸까요? 재미삼아 초등학교 갓 들어간 딸한테 입어보라고 했는데 종아리가 어떻게 딱 맞지? 치마는 또 왜 그렇게 짧은 것만 입었을까요? 과거회상하다 헐크처럼 겨드랑이를 터뜨린 블라우스까지. 마치 다른 여자랑 옷장을 나눠써온 것 같아요. 지금도 희한한 옷들을 좋아하지만 아이들 봐서 많이 참느라 쇼핑몰 위시리스트에만 넣어놓고 상상 속으로 입는 빨간 옷, 파란 옷, 찢어진 옷…


나의 옛날 옷들은 우리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물려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취향이 같을지는 모르겠어요. 입혀놓으면 애순이가 금명이를 바라보는 마음이려나? 왠지 우리는 분명 서로 다를 것만 같아서 당근에 야심차게 진열해보기도 했지만, 어디에나 멀쩡한 물건이 넘치는 요즘은 연락도 쉽사리 안오네요. 옛날 친구들, 사진들, 물건들, 이제 이 옷들마저 없으면 언젠가 좋았던 작은 순간들을 떠올릴 매개체가 또 사라지게되는건지?


성급히 사망선고한 나의 하나뿐인 부라더에 미련이 남아 동네에 수리해준다는 데를 찾아 반갑게 전화를 하니 40년 된 미싱도 고칠 수 있다고 하네요. 요즘 물건 중엔 밧데리 교체도 어려워서 쓰고 버려야만 하는 게 있던데 옛날엔 물건을 참 소중하게 생각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나봐요. 내일 기대를 안고 가기로 했습니다. 추억을 심폐소생 해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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