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물속에서, 이제야
몸을 녹여야겠다.
물을 채운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고, 배쓰밤이 스르르 녹아든다. 거품이 부드럽게 퍼지고, 라벤더 향이 공기 속에 스며든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충분한 크기의 욕조다. 물속에 몸을 담그면 근육이 풀리고, 숨이 깊어진다.
어릴 때부터 나는 목욕을 좋아했다. 욕조에 몸을 담그면 물이 귀를 감싸고,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늘 오래도록 그럴 순 없었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해야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현실. 흔한 아파트처럼 우리 집에도 화장실이 두 개 있었지만, 욕조가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욕조는 ‘엄마의 욕조’였다.
내 목욕이 끝난 후, 그녀는 꼭 욕조를 확인했다. 바닥에 물이 흥건한 것도 아니고, 욕조에 찌든 때가 남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욕조 안쪽에 남은 몇 방울의 물기, 내가 떠난 자리의 흔적 같은 것들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언니는 목욕하고 나면 물기를 싹 닦아내고, 배수구 마개도 예쁘게 걸어놔. 너도 그래야지. 너는 늘 이렇게 뒤처리를 대충 해. 이게 엄마를 무시한다는 태도야, 엄마가 보기에는.”
“그럼 목욕하고 나서 호텔 체크인 할 때 상태처럼 깨끗하게 유지하라는 거예요?”
“이거 봐. 말 대꾸하는 것만 봐도 넌 내 딸이 아니야. 넌 이렇게 어른을 무시하는 애야. 버릇이 없어.”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는 시간은 짧았고, 나오는 순간부터 긴장이 시작되었다. 목욕 후 늘 꾸중을 들으면 피부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제부턴가 목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했고, 엄마와의 연을 끊었다.
연을 끊은 지 3년 차다. 엄마의 목소리는 이제 희미하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다. 그녀의 말들은 늘 내 안에서 맴돌았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의 말들이 내 머리에서 떠오르다가도 점점 멀어진다.
목욕이 끝난 후 욕조에 남은 물기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비누 거품에 대해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이제야 평온한 목욕을 할 수 있음에 행복하다. 아무도 목욕 중 문을 두드리지 않고, 아무도 나를 꾸짖지 않는다. 욕조에 남은 물방울은 저절로 마를 것이고, 거품도 결국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언제든 따뜻한 물속에서 편하게 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