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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Oct 19. 2024

아이는 답을 알고 있다

일상의 글쓰기 - 글감[상처]

퇴근길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다. ‘이쁜 막내딸 ㅇㅇ’이다. 얘도 학교 끝나고 걸어오는 시간이다. 또 뭔 일일까 나도 떨리네. “엄마, 나 진짜 억울해. 오늘 반 대항 피구 리그전이 있었거든? 어제 체육복을 빨려고 집에 들고 왔는데 깜빡해 버렸어. 근데 체육복 안 입으면 실격이라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말도 안 해줬다고. 체육 선생님도, 담임 선생님도. 세린이도 몰랐대. 걔는 사물함에 있어서 입은 거야.” 으이그, 말을 안 해 줬겠냐? 네가 안 들은 거겠지. 그러게 평소에 주변에 관심 좀 두고, 준비물 잘 살피라고 몇 번을 말했니?     


그냥 부드럽게 물었다. “다른 얘들은 어떻게 알고 입은 거야?” “몰라. 다른 반에서 들었나 봐. 무슨 공고를 붙였다는데 난 본 적 없다고. 심판이 3분 안에 체육복 안 입고 오면 나 빼고 17대 18로 그냥 하겠다는 거야. 반바지 활동복 입고 있었는데 그냥 하게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진짜 뭐 그리 규칙이 빡빡해? 교실로 가는데 주현이가 보여서 얼른 빌려서 갈아입고 갔는데 이미 시작했다고 경기에 못 들어간대. 결국 우리 반이 2대 0으로 졌는데 2세트에서는 하필 1점 차이로 진 거야. 시원이가 나 때문에 졌다고 하는 소리 들었다니까. 자기들이 못 으면서 왜 내 탓을 해? 그리고 1세트는 그렇다고 쳐도 2세트는 할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진짜 너무해.” 그러게. 2세트에라도 넣어서 혹시나 원망 들을  사정 좀  주지. 안 그래도 여린 애가 얼마나 눈치를 볼꼬. “그래, 심판이 너무했네. 중학교라서 규칙이 엄격한가 . 엄마 운전하고 있으니 집에서 이야기하자.”     


집에 들어서자마자 옆에 붙어 다시 하소연한다. “얘들이 뭐라 할까 봐 얼른 교실로 들어왔는데 축구 끝내고 온 남자애들이 ‘야, 누구냐? 체육복 안 입은 얘가. 여자애들 빡쳤던데.’ 그러는 거야. 나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얘들이 내 욕한 게 뻔해.” “속상했겠다. 내일도 그러면 그냥 미안하다고 해 버려. 어차피 네가 들어갔어도 체육 잘못하니까 빨리 죽었을 거라고 말하면 되겠다.”      


“엄마, 얘들이 얼마나 어린지 알아? 그런 말을 들어주겠어? 아마 화낼걸?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아. 걔들한테는 리그전이 진짜 중요해. 공부보다 더. 엄청 이기고 싶었는데 졌으니까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겠지. 그게 바로 나라고. 사실 나도 피구 하고 싶었는데 못 해서 내가 제일 속상한데 말이야. 그것보다 내일부터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들어올 때마다 ‘너희 피구 리그전 어떻게 됐어?’ 이렇게 언급할 것 같아서 그게 제일 걱정돼. 그러면 또 체육복 얘기 나올 거고. 1학기 때도 선생님마다 다 그랬거든. 난 좋은 일로도 주목받는 게 싫은데 이건 곤란한 일이잖아. 얘들이 막 나때문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      


“안 그럴 수도 있어. 오늘도 잘 지나갔잖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미리 염려하고 스트레스받는 게 제일 쓸데없대. 편하게 마음먹어. 다 잘 지나갈 거야.” “나도 아는데, 마음대로 안 돼. 머리에서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 너무 불안해. 떨려서 잠도 안 와. 엄마한테 이야기라도 해야 긴장이 좀 없어져서 계속 말하는 거야.” 딸아, 나까지 골치 아프다. 제발 당당하고 씩씩할 순 없겠니?   

   

아침부터 아이 얼굴색이 안 좋다. “엄마, 배 아파서 밥 못 먹겠어.” 학교 가기가 싫은가 보구나. “응, 그러면 먹지 말고 가. 엄마 먼저 출근할게. 괜찮을 거야. 네가 이겨내야지. 잘 갔다 와.” 모른 척 얼른 나와버렸다. 어른이 보기엔 사소한 일이 아이의 몸과 마음과 온 세상을 잠식해 버린다.     


또 전화가 울린다. 어제와 같은 시각이다. “엄마, 흑흑.” “왜 연기하고 있어. 별일 없었지?” “히히. 어떻게 알았어? 얘들이 대놓고 뭐라고는 안 하더라고. 피구 얘기 나올 때마다 눈치 보이긴 했어. 엄마, 근데 내가 국어랑 기술 선생님한테 가서 리그전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 그 선생님들은 꼭 꺼낼 것 같았거든. 기술 선생님은 너무 무서운데 꾹 참고 말했어.” “오, 용감하네! 뭐라고 하셨어?” “국어 선생님은 ‘그래, 안 할게.’ 이러고 기술 선생님은 ‘안 할 건데?’ 그러시던데? 어쨌든 살 것 같아. 너무 후련해. 어제는 지옥이었는데 이제는 천국!” 아이고, 고생했네, 소심한 우리 딸. 선생님 찾아갈 줄도 알고.  

    

진짜 체육복 한 번 안 가져왔다가 이게 뭔 일이야. 하루가 1년 같았어. 사실 내가 잘못하긴 했지. 내가 준비물을 잘 못 챙기는 편이긴 하거든. 앞으로 체육복은 절대 안 잊어먹을 것 같아. 히히. 그리고 나라도 중요한 경기에서 한 명 빠져서 우리 반이 졌으면 속으로 짜증 냈을 것 같아. 얘들이 다 그렇지 뭐. 이제 준비물도 신경 쓰고, 공고 같은 것도 잘 확인해야겠어. 근데 말이야. 어제 주현이 만났을 때 꼭 신데렐라 된 것 같은 기분 알아? 옷이 없어서 무도회 못 가는데 천사가 딱 나타나서 옷을 주는 장면 같았어. 체육복 입고 갔어도 결국 실격이긴 했지만. 들고 뛰어와서 건네주는 주현이가 고맙더라고.” 저녁 내내 또 체육복 이야기다. 이번엔 밝게. 떼만 쓰는 줄 알았더니 자신을 돌아볼 줄도 아는구나.      


비난이 먼저 나가니 억지가 돌아왔다는 걸 깨닫는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아이의 평소 태도를 못마땅해하며 잘못부터 훈계했을 것이다. 아이는  실수를 인정하지도 않았을 테고, 상황을 공감해 주지 않는 엄마에게 상처받고 마음의 문을 닫았겠지?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해.’ 하면서. 내면이 강해서 쉽게 이겨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내 처럼 조심스럽고 여려서 세상과 부딪치는 게 힘겨운 아이도 있다. 이해하고, 스스로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용기만 줘야지. 이렇게 겪어내다 보면 조금씩 더 단단해지겠지. 지적하거나 해결책을 주지 않아도 아이는 답을 다 알고 있으니까.      


“엄마, 근데, 아직 수업 안 들어온 선생님도 있는데 물어보진 않겠지?” 휴, 늦둥이 딸아이의 엄마 노릇 만만치 않아. 오늘도 버럭 하고 싶은 걸 누른다. 아이가 크는 만큼 엄마도 성장한다. 더 성장하면 할머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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