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밤, ‘나는 솔로’ 프로그램에서 남녀의 풋풋한 ‘썸’이 흥미롭다. 여자는 성격 좋은 ‘영자’, 남자는 순수한 ‘영수’에게 호감 간다. 나도 왕년엔 썸 좀 탔었는데. 맞다! 정ㅈㅇ. 갑자기 그 남자 이름이 기억났다. 가끔 떠올리려 해도 가물가물했는데 이제 이유를 알겠다. 몇 년 전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이랑 이름이 같다. 새로운 정보가 옛 기억을 덮어 버리는 현상, 부르는 단어가 있을 것 같은데?
첫 발령이 났다. 음악과 미술 중에 교담을 고르라고 했는데, 같이 부임한 연예인처럼 아름다운 선생님이 자기는 음악은 못 한다며 홀랑 미술을 가져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도 얘들 눈엔 예쁘고 인기 많은 음악 선생님이 되었으니까. 후훗. 미혼 교사로 이루어진 ‘처총회’의 비율이 남녀 일곱 명씩으로 딱 맞았다. 식당, 노래방, 가끔은 나이트클럽에서 어울리던 그 시간은 세상없이 즐거웠다. 젊음과 자유의 하모니랄까. 세 커플이 탄생했지만, 거기에 내 짝은 없었다. 내게 집적거리는 충청도에서 온 체육 선생님은 촌스러운 데다 아저씨 같아서, 피부가 희고 깎아 놓은 밤톨같이 귀엽게 생긴 4학년 선생님은 유머 있지만 능글맞아서 제쳤다. 나와 함께 보이 스카우트 대장을 맡은 심 선생님은 착하고 넉넉하고 능력 있는 참 좋은 사람인데 '곰돌이 푸'처럼 퉁퉁해서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침마다 내가 출근하는 것을 눈여겨보고 한 번만 만나고 싶다는 동네 총각(학생의 삼촌), 나를 며느리 삼고 싶어 하는 교감 선생님의 아들과 소개팅도 해 보았다. 다 별로다. 내가 아깝다. 사실 내 눈에 쏙 드는 남자는 상상에나 있겠지.
어느새 심 선생이 나랑 친한 선배랑 교내 커플이 되었다. “내 친구 소개해 줄게요. 부산교대 총학생회장이었어요.” 회장? 나 권력에 약한 줄 어찌 알았지? 넷이서 맥주 한잔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오! 신이시여. 호프집 문을 열자 저절로 눈길을 사로잡는 젊은이가 심 선생 옆에 앉아 있다. 광채가 영롱한 저 남자가 정녕 저를 보러 온 겁니까? 영화배우 이진욱을 닮은 딴 세상 외모에다 손석희 앵커의 지적인 이미지까지 풍겼다. 완전 내가 꿈꿔 온 이상형이잖아. 한눈에 반했다는 걸 모르게 태연하게 굴어야 해. 두근두근하는 심장을 들킬세라 짐짓 더 발랄한 척했다. 어떡하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눈치 없는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다. 엉뚱한 말까지 자꾸 튀어나온다.
서로 잘 통해 분위기가 유쾌했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잊혔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 맴도는 말이 있다. “노을 지는 풍경과 그맘때의 냄새를 좋아해요. 석양 아래에서 무더기 져서 불타는 영산홍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충격! 이런 멜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감수성 가득한 남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그 말을 할 때의 '우수에 젖은 눈빛', 소설이나 노래 가사에만 박제됐다고 생각한 그 표현이 살아 있을 줄이야. 나를 향하는 그윽한 눈웃음이 황홀하다. 황송해라.
아싸! 저녁에 잘 들어갔냐고 전화가 왔다. 나직한 저음, 다정한 말투, 경상도 사투리가 이렇게 멋질 일이야? 스물넷. 이 남자가 내게 오려고 그동안 외롭게 모태 솔로로 지냈던가. 다음 날, 그다음 날, 저녁이면 통화했고, 주말엔 넷이 같이 한두 번 더 모였다. 그렇게 보름쯤, 세상은 찬란하고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이젠 둘만의 데이트를 기다리는데 이런, 연락이 안 온다. 아직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어서 먼저 전화할 용기가 없다. 긴장의 1주, 2주가 지났다. 실망으로 가슴이 허전하다. 혼자 착각했다고? 나 그렇게 바보는 아닌데. 거리에서 오토바이가 옆을 지날 때 왜 어깨를 끌어당겨 떨리게 한 거야? 어째서 내가 하는 말이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별일 아니어도 크게 소리 내어 웃은 거냐고. 귀엽다는 듯이 내 앞머리를 헝크러뜨리지나 말지. 그랬으면 기대도 없었을 텐데.
심 선생이 이유를 말했다. 헤어진 여자가 임신했다며 뒤늦게 알려 왔고, 그래서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고. 나랑 더 발전하지 않아서, 상처 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다고. 웬 운명의 장난인가. 차라리 내가 맘에 안 들어서라고 했으면 더 나았으려나? 임신이라는 말을 옆에 붙이기에 그는 너무 고결해 보였는데. 아무 사이도 아닌데 배신감을 느끼는 아이러니는 또 뭔가? 그래, 그림 같은 연애가 내 차지가 될 리 없지. 흘리고 다닌 남자가 멋지기는 개뿔. 원망과 허탈감, 자기 비하가 섞여 덜그럭거린다. 그렇게 하나님은 내게, 꿈꾸던 이상형과의 로맨스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보여 주지 말지. 놀리는 것도 아니고, 참 너무하십니다.
며칠 지나 시내 건너편에서 혼자 걸어오는 그와 딱 마주쳤다. 당황하는 표정, 예의 그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은 척 차분하게 의미 없는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루어지지 않은, 쓸쓸해 보이는 남자랑 정말로 작별했다. 잘 가요. 행복하길. “저 사람이야? 난 너무 그늘져 보여 별론데?” 옆에 걷던 언니가 말했다. ‘언니, 그거 나 때문일지도 몰라. 그 눈빛 못 봤어?’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거의 막장 드라마를 찍었을 텐데. 울고불고하는 가슴 쓰린 추억을 안 남겨 다행인가, 그런 아픈 사랑 하나쯤 고이 품지 않고 너무 순수하게 남아 불행인가?
그는 결국 그 여자랑 결혼해 책임을 다했을까? 잊고 있던 세월이 좀 궁금하긴 하네. 잠시 설렘을 뿌리고는 당장 거둬 간, 첫사랑도 뭣도 아닌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는지 다음에 심 선생을 만나면 물어봐야지. 아이고, 그나저나 연애한 남자는 없고 연애할 뻔한 남자들만 잔뜩 스쳐 갔구나. 그래서 내게 상처가 없는 건가?
맞아. 상처는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는 거라 진짜는 꺼내기가 어렵지. 그건 너무 아파서. 그래서 이 이야기로 갈음하고 내게서 상처는, 일단 못 찾은 걸로 하겠다. 끈끈하게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가을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