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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왜 이리 어려워?

1920년

by 솔향

남의 아이 쑥쑥 크는 것처럼 일주일이 왜 이리 후딱 후딱 날아가는지. 쓸거리도 없는데, 오늘도 브런치에서 글을 빨리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그래그래, 알겠다고. 뭘 쓰나? 학교 이야기는 솔직하게 하면 내부 고발자 같고, 아름다운 일화만 쓰면 재미없어 패스. 남편과의 일은 너무 개인적이라, 사춘기 딸내미 상황은 아직 진전이 없어서 통과. 이것저것 걸러내면 추억거리 밖에 안 남는데 그것도 어째 노인네 같고, 당기지 않는다.


시 이야기나 해야겠다.


올해는 지지부진한 수필을 좀 더 잘 쓸 수 있을까 싶어 옹졸 작가와 함께 시 수업에 등록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 시인이자 교수이신 강사님이 시골의 아름다운 문학관에서 무료로 가르친다. 나야 수업이 밤늦게 끝나도 관사에서 자고 출근하면 되지만, 옹졸 작가는 집까지 왕복 두 시간 넘게 왔다 갔다 해야 한다. 그래도 롱디 연인처럼 만나는 걸 즐겁게 기다린다.


수필도 그렇지만 시는 더더욱 생각해 본 적 없다. 읽을 줄도 모르는데 쓴다는 건 가당치도 않다. 게다가 다들 왜 그렇게 어렵게 쓰는지도 모르겠다. 감성이 바닥인 나는 그저 시인은 다 천재로 보인다. 현대시의 역사부터 시작한 시 강좌 첫 시간부터 나와 옹졸 작가는 자신감 넘치는 교수님의 시 수업에 푹 빠졌다. 시보다는 그의 달변에 매료되었다고 해야 하는 게 맞겠다. 초보이니 일단 매일 직유법 문장부터 열심히 만들어 보라고 했다. 직유법이 그리 어려운지 처음 알았다. 숙제로 직유법 다섯 문장과 시 한 편을 단체톡에 올리는데 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무릎을 치는 직유가 나오지 않는다. 겸손치 못하게도 직유 문장 연습은 자체 생략하기로 했다.


숙제는 안 내고 듣기만 하다가 드디어 첫 시를 제출했다.




ㅇㅇ종합병원 / 솔향


키 큰 곡괭이 자루처럼 허리가 꼿꼿한 1번과

닳아 무뎌진 낫같이 몸이 접힌 2번이

붙어 앉아 있다

오른발에 깁스를 한 긴 파마머리 여자가

목발에 기대어 캥거루처럼 겅중거리고 들어와

3번이 되었다


김복순 님! 김복순 님! 김복순 님!

나 부르요?

1번이 느릿느릿 일어선다

수납하고 주사 맞고 가셔요

아니 그쪽 말고 반대쪽이요

귀에 바짝 대고 소리친다

으응, 나도 주사실 어디 있는지 알어

영감님이 쩍서 진료받고 있어

같이 갈라고


복도 바닥에 눈 맞추며 2번이

늙은 앵무새처럼 중얼거린다

먼저 맞음서 기다리제 꼭 같이 다닌다고 난리여


시를 배우는 3번이 쿡 웃는다

어렴풋이 지팡이 너머를 본다

손때 묻은 낡은 베개 같은 사랑은 얼마나 든든한가

얼마나 눈물겨운가


교수님이 마지막 연의 '시를 배우는'만 빼면 좋겠다고 했다. "처음 쓴 거 맞아요?" 하면서. 아싸!


후회 / 솔향


눈이처럼 까만 여자가

오일 파스타를 돌돌 말며

새로운 곳은 어떠냐 물었어

현명하게 해결한다고

다들 나를 좋아한다고

고양이처럼 가릉가릉 무용담을 늘어놓았지


그럴 줄 알았다며

그녀가 웃었어

자잘한 초록잎이 반짝이듯 잔잔하게


시동을 걸어 놓고

핸들에 팔을 얹고 고개를 묻었어

물기 없이 바스락거리는 이파리보다 가벼운 게 자랑인데

현명은 개뿔

달랑거리는 실거미처럼 나약한 다짐이여


눈이 깊은 그녀는

실망 한 모금 쌉스름하게 넘겼겠지

안도 한 숨 슬그머니 삼켰을지 몰라


부끄러움이 모락모락 피부를 뚫고 나왔어

힘껏 액셀을 밟아 내게서 멀리 도망쳤지

저 끝에 가면 내가 있을까


두 번째 숙제. 앞의 자잘한 초록잎과 뒤의 물기 없이 바스락거리는 이파리가 연관되면서 대비가 된다며 내가 의도하지도 않는 부분까지 찾아내어 칭찬했다. 역시 꿈보다 해몽. '숲'은 너무 비유가 크다, '현명은 개뿔'은 시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다, 1연의 내용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등의 지적은 했지만 시를 잘 쓸 것 같다는 피드백을 주셨다. 처음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과 함께. 진짜? 나 소질 있는 거 아녀?



세 번째 숙제인 <보름달> (이 전 글에 수록)을 올렸다. 옹졸 작가가 정말 잘 썼다고, 너무 공감이 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난 좀 걸리는 게 많은데, 그 정돈가? 초보자 말만 듣고 으쓱하다가 결과는 혹평 일색(너무 많아서 다 못 씀.) 4연 빼곤 다 재미없다고. 흑흑.



지난 주, 네 번째 시를 올렸다.


어떤 기다림 / 솔향

미소가 희미해진

안개꽃과 스타티스 사이

뼈까지 바삭하게 마른 장미

마지막 피 내어준 붉은 카네이션

세어버린 머리를 기댄다


달콤한 향기 부스러기

짓물러진 상처에서 뜯어진 딱지

발버둥 칠 때 떨어진 눈물

부예진 갈색 물에서 삶의 흔적이 들썩인다


뿌리도 없이 검어진 몸은

널어놓은 빨래처럼 홀가분하게

흥얼거리는 발자국 따라

환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고요히 기다린다


베토벤 선율만큼 충만한 오후 햇살이

걸레 자국 지나간 거실을 거닌다


'베토벤 같은 음악가 이름 쓰지 마세요. 시의 분위기가 쓸쓸함을 주기는 하지만 상투적이에요. 그리고 드디어 바닥이 드러났어요. <어떤 기다림>, 이런 제목은 1920년대에나 쓰던 제목이에요. 요새 나오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어보세요."


옆에 있던 옹졸 작가가 빵 터졌다. 그리고는 자기 카톡에 내 이름을 '1920년'으로 바꾸었다.

겨우 숙제로 네 편 냈는데, 이제 못 쓸 것 같다.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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