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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

남에게만 친절하지 말고

by 솔향

중2 딸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화를 내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는 줄 알면서도. 언제쯤이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며, 바른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현명하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을까? 백날 책으로 공부하고 강의 들으면 뭐 하나? 막상 상황을 맞닥뜨리면 굳건하다 믿었던 모든 다짐은 모래성처럼 무너지는데.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다음 주 수학여행에 딸이 입을 옷을 사러 갔다. 점심 먹으러 간 떡볶이집 건너편에 보세 옷가게가 있다. 청바지를 두 벌 입어 봤는데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청치마도 사고 싶다더니 대충 보고는 다 싫단다. 나는 괜찮은 게 있나 이것저것 살피며 분주히 움직이는데, 아이는 슬쩍 보기만 할 뿐 소극적이다. 자기가 가고 싶다고 한 곳인데 뭉그적거리는 모습에 천불이 난다.


30분 넘게 결정을 못 하는 아이에게 속이 터진다. 퉁명스럽게 다른 가게로 가자고 했다. 청소년들이 많이 가는 저가 브랜드 옷집이다. 주차장을 못 찾아 여러 번 돌다 겨우 차를 댔다. 내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색깔이 맘에 안 든다, 입고 벗기 힘들다, 이유도 많다. 청바지가 색깔이 다 거기서 거기지. 이렇게 까다로우면 목포에 있는 옷가게를 다 뒤져도 고르기 힘들 것 같다. 자기가 정해 놓은 기준에 딱 맞지 않으면 안 되는, 융통성이 없는 성격에 화가 난다. 입어 보는 것도 귀찮아한다. 입어보고 그중에 괜찮은 걸로 정하면 되겠구먼, 답답하다.


드디어 아이가 맘에 드는 청치마를 하나 발견했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지 아까 그 청바지도 사겠단다. 다행이다. 꽉 막혔던 속이 조금 내려간다. 입고 싶다던 니트 조끼는 못 찾았지만 대신 후드집업과 츄리닝 바지를 골라 계산하고 나왔다. 여기서도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무지하게 피곤하다. 하지만 또 다이소에 들러야 한다. 친구 생일 선물로 인형을 사야 한단다. 그래. 걸어가긴 힘드니 거기까진 데려다줘야지. 다 늙어서 이게 뭔 고생이람. 이젠 체력이 달린다. 에휴.


겨우 미션을 클리어하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가 머뭇거리더니 '엄마'를 부른다. 요샌 딸의 '엄마' 소리가 제일 무섭다. 아울렛에 가서 니트 조끼를 사면 안 되냐고 한다.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너는 원하는 건 다 가져야 해? 여러 개 샀으니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지! 까탈스러워가지고 빨리 사지도 않으면서."

"엄마, 왜 그렇게 화내면서 말해? 아까부터 계속 뭐라 하고."

"내가 언제 화냈는데?"

"계속 화냈어. 나도 소윤이 언니처럼 조끼 입고 싶었어. 나는 그런 예쁜 옷 없잖아. 봄에도 옷 하나도 안 샀고, 지금 처음 사는 거잖아. 교복 입는다고 항상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고. 나도 수학여행 가서는 맘에 드는 걸로 입고 싶다고. 집에 가서 인터넷으로 살 거야!"

"맘대로 해. 대신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네가 알아서 해! 그리고, 지난달에 반팔이랑 바지 사 준 거 기억 안 나?"

지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따박따박 말하는 딸에게 맞받아쳤다.


입은 다물었지만 둘 다 표정과 몸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집에 도착했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영수증을 보니 청바지, 청치마, 후드집업, 츄리닝 바지, 다 합쳐도 12만 원이 되지 않는다. 오늘 딸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몸이 쑥 커 버린 딸, 옷 타령은 거의 안 하던 아이다. 비싼 걸 사 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쯤은 새로 장만해 줄 수 있다. 사춘기가 와서 외모에 신경이 쓰일 것이다. 청소년 옷을 골라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좀 느릴 수도 있다. 경험이 쌓이면 노하우가 생길 것이니 좀 서툴러도 기다려 주며 함께 재미있게 고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화가 났을까?


왜 별일 아닌 일에 딸의 입장에서 공감해 주지 못하고 못마땅해했을까? 지금 아이가 자존감이 약하고, 친구관계와 공부를 힘들어하는 것이 모두, 그동안 아이가 힘든 일을 포기할 때 허용적으로 받아줘서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 결핍을 몰라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키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올라온다. 야무지게 제 할 일을 했으면 좋겠는데 어리숙하거나 남에게 미루는 행동을 하면 조급해진다. 아이의 마음을 공감해 주면 관계는 좋아지지만 그럴수록 자기 감정만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엄마가 저를 위해 노력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어떡하나 두렵다. 어디까지 친절하고, 어디까지 단호해야 할지 그 경계를 세우기가 어렵다.


결국 인터넷으로 아이가 고른 니트조끼를 결제했다. 겨우 만 칠천 원 짜리지만 잘한 일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아이 마음이 아플까 봐 줏대 없이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닌지.


짜파게티를 끓이는 아이에게 저녁밥을 먹던 남편이 한 소리한다. 봉지를 싱크대 위에 그대로 두지 말고 쓰레기통에 넣으라고. 목소리가 단호하다 못해 질책하는 어조가 잔뜩 높다. 벌써 아이의 기분이 상했다. 다 먹고 하려고 했다고 말대꾸한다. 남편의 목소리가 더 무서워진다. 본인만 모른다. 거울을 보여주고 싶다. 분위기는 한 겨울 칼바람이 부는 듯 얼어붙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겠지. 남편을 통해 나를 본다. 같은 말이라도 좀 더 부드럽게 해 가르칠 수 있을 텐데. 둘 다 다정하게 말하면 아이가 듣지 않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저녁을 먹고 아이가 책을 같이 읽자며 다가왔다. 아무리 책 좀 보라고 해도 시간 없다며 휴대폰만 보더니만,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자기 식대로 화해를 요청한 것일 게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 <죽이고 싶은 아이 2>를 번갈아 가며 소리 내어 읽었다. 한 시간이나 읽어 목구멍이 아프다.


그래. 사춘기라 까칠하고 불안해서 가끔 버릇없이 굴고, 여러 면에 뒤쳐지기는 하지만, 느리면 느린 대로 아이는 자기 길을 걸을 것이다.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아이를 단죄하지 말고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면 바르게 성장할 것이다. 믿는 대로 클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어른의 판단력을 요구하지 말고 기다려 주자. 오늘만 해도, 보라. 어리석은 엄마보다 얼마나 더 나은 아이인가. 아이에게 화해와 사과하는 법,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제발 친절하자. 남들에게만 친절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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