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과 꿀이 흐르는 풍(丰)땅 위의 대관람차
주나라 순례 ① - 젖과 꿀이 흐르는 풍(丰)땅 위의 관람차
중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제가 시안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어디일까요?
주(周)나라와 관련 있는 장소인데, 저는 이곳을 경건한 마음으로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힌트가 충분치 않아 맞추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곳은
풍하(沣河) 동편의 대관람차 OCT1314입니다.
더 정확히는 저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땅(丰邑)과 이를 가로지르는 풍하(沣河)를 방문한 것이고, 이곳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기 위해 OCT1314에 오른 것입니다.
OCT1314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이 관람차는 부동산 개발 회사 OCT(华侨城)가 코로나가 마무리되고 있던 때인 2023년 초 그들이 운영하는 해피밸리(欢乐谷) 앞에 건설한 것입니다. 벌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데다가 높이가 131.4m에 이르다 보니, 주변에서도 잘 보이고, 객차에서도 주변 일대가 한눈에 훤히 보입니다. 30번 고속도로(连霍高速)를 타고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갈 때 왼편에 보이는 관람차가 바로 이것입니다.
관람차의 높이가 131.4m인 것은 '1314'라는 숫자가 중국어 '一生一世'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인데, 아마도 ‘평생토록 (너만을 사랑하겠다)’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一生一世'라 하면 저는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李奎報)의 무관탄(無官嘆)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인데(아마 나중에 자세히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통하여 고려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탁월한 문인이며, 관운도 좋아 말년에는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도 젊은 시절에는 제대로 벼슬을 얻지 못해 울적한 심정을 토로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는데, 그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시가 이 무관탄(無官嘆)입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그에 걸맞은 직장을 얻기 쉽지 않은 요즘 중국 젊은이들의 답답한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이규보의 무관탄이 단순한 옛사람의 하소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무관탄(無官嘆)》
계속 관직이 없었고, 지금도 관직이 없네.
사방 먹고 살려고 애쓰다 보니 전혀 기쁘지 않구나.
시간이나 때우며 괴로워하는 건 이젠 그만하고 싶은데.
아아 평생토록(一生一世) 내게 주어진 운명이 이렇게도 쓰리고 아픈지.
常無官常無官, 四方餬口非所歡, 圖免居閑日遣難, 噫噫一生一世 賦命何酸寒.
시안에서의 마지막 날에 오른 OCT1314
출국을 하루 앞둔 7월의 무더운 날 저는 그렇게 딸과 함께 OCT1314에 올랐습니다. 햇살이 강렬하고 무더운 날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버스도 오지 않고 택시도 안 잡히는 바람에, 땡볕 아래 50분 넘게 걸어야만 했습니다.
해피밸리에 도착해서도 입장권을 구매하는 게 순조롭지 않았고, 실내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푹푹 찌는 구불구불하고 긴 통로를 걸어야 했기 때문에, 기분이 상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객차에 올라 자리에 앉는 순간, 놀랍게도 불쾌한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청량한 음악, 새것 느낌이 가득한 작은 공간이 단번에 우리 기분을 쾌적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잠깐 숨을 돌리고 있자니 관람차가 떠오르며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펑동지구(西咸新区/沣东新城)의 애매한 입지를 상징하는 양, 비죽비죽 짓다 만 회색빛 건물들과 파헤쳐진 흙더미들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해피밸리 쪽으로 물놀이장과 아즈텍 체첸잇샤가 보이는가 싶더니, 물놀이장 너머로 드디어 실개천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저 작고 초라한 하천(沣河)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서 저는 이 관람차에 올랐던 것입니다.
‘풍하’라는 이름의 하천과 그 일대의 ‘풍땅’은 중원 문명의 가장 오래된 발원지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곳은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도 이상향처럼 여겨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사대부의 후예로서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풍(丰)땅을 가로지르며 북쪽으로 흐르는 이 하천은 그들에게 ‘요단강’이자 ‘인더스강’이며, ‘압록강’이자, ‘나일강’이고, 또한 ‘한강’입니다. 또한 이 하천 주변의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은 다윗의 ‘시온성’이자,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카바 신전’이며, 단군의 ‘백두산’과 같은 곳입니다.
히브리족이 대제국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서 방황한 후 결국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나라를 세우고 번영하였다면, 희씨 일족은 척박한 황토고원에서 수 세대 동안 방황한 후, ‘풍하’를 건너 대제국의 한 귀퉁이에 정착하였고 결국은 상나라를 무너뜨리기까지했습니다.
즉 히브리족이 제국의 심장부에서 탈출하여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면, 희씨 부족은 제국의 심장부로 파고들어 번영의 기초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상나라는 위대한 대제국이었습니다. 이집트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풍요롭고 위대한 대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씨들이 상나라를 무너뜨린 이후에는 그 누구도 상나라를 기억하거나 숭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상나라의 정신은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후의 모든 중원의 왕조들은, 심지어 원나라같은 정복왕조들 조차도, 모두 주나라를 계승하였다고 할 수는 있어도, 상나라의 뜻은 이어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갈대아 우르(메소포타미아)를 홀홀단신으로 떠났던 아브라함이 서구 문명사에 주춧돌 하나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유일신” 사상이라는 그의 새로운 영성 덕분이었다고 한다면, 비루했던 희씨들이 상나라 대신 중원의 기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온 고공단보(주나라 문왕의 조부)가 품었던 “덕(德)”이라고 하는 새롭고 위대한 영성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아브라함과 고공단보의 정신은 모두 어처구니 없고도 이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이 세웠던 나라인 조선은 철저하게 주나라의 정신에 기초한 나라였습니다. 약간은 심한 말일 수도 있으나, 탈레반이 통치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은 신앙심에 기초한 종교국가였습니다. 그들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주나라를 본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발버둥쳤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 중 풍땅을 직접 밟을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도 한 명도 없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서주(西周)의 도읍이었던 호경(镐京)이 불타버린지 얼마 흐르지 않은 춘추시대의 사람들 조차도 풍땅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폐허가 되어 잊혀졌으니, 그로부터 무려 2,000년 후에 세워진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풍땅은 마치 실제하지 않는 에덴동산과 같은 유토피아로 느껴졌을 터입니다. 직접 찾아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날의 저는 편하게 OCT1314 관람차에 앉아서 풍땅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알았다면 저를 부러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20세기 초 조선의 불운을 떠올리며 생각이 번잡해졌습니다. 참으로 조선은 저에게 애증의 나라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을 떠올리며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관람차에서 내려와 풍동 지역을 돌아다니며 얼마간 산책했습니다, 이 동네에 주나라를 떠올릴 만한 곳은 거의 없어서 아쉽습니다만(얼마전에 건립된 "시경리" 정도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까요),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 최고 명문학교 중 하나인 풍동중가학교 앞에도 찾아가보았습니다.
시안은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같은 쟁쟁한 나라들의 수도였기에 주나라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부에서 호경의 현재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기념 공원이나 박물관 하나 지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지막으로 풍땅을 순례하며 시안생활의 마지막 페이지를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안생활은 추억이 되었고 제 삶은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