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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끈한 콜라 Nov 15. 2023

만성(满城)이 무너진 날 - 시안종루(钟楼)

시안종루(西安钟楼)


종루는 저에게 이 도시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대안탑, 병마용, 화청지 등도 상징적인 가치가 충분하지만, 역시 종루만한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면 발길이 자연스레 이곳으로 옮겨지곤 합니다. 특히 번잡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울 때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려 고개를 들어 종루를 바라보면 즉시 마음이 차분해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근처를 잠시 서성이다가 식당에 들어가 알싸한 맛의 미엔피엔(面片)을 먹고 나면, 몸과 마음이 비로소 온전히 회복됩니다. 이렇듯 시안 종루는 일상에서 벗어나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저의 피난처랄까요.

     

서북지방 즉 섬서, 간쑤, 닝샤에서 즐겨 먹는 미엔피엔 (面片)


이 건축물은 언제 봐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낮에는 물론 밤에도, 날씨가 흐리거나 맑은 날에도, 여름이나 겨울에도 항상 멋진 모습을 자랑합니다. 푸른 지붕과 붉은 기둥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고풍스러운 그 운치는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적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베이징 천단공원의 기년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물론 그곳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지만,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켜온 건축물다운 독특한 향기와 분위기가 언제가 마음에 듭니다.   

  

종루+고루의 야경. 2022. 2. 1. 촬영


팁을 하나 드리면, 바로 옆 개원 백화점(开元商城)의 붉은 계단에 올라가 종루를 살짝 내려다보면 꽤 괜찮습니다. 이곳에서 종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백여 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어떤 전투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 전투는 이른바 시안봉기(西安起义)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해혁명으로 정의되는 일련의 무장봉기 사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10월 10일 우창에서 감행된 반란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시안에 전해지자, 도시 전체가 긴장감에 휩싸였습니다. 도시 외각에 주둔하던 신군이 10월 23일 새벽 움직이기 시작하자, 팔기군은 종루와 성벽에 올라 말 그대로 결사항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격렬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고루(鼓楼)에서 바라본 종루와 개원백화점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신해혁명(辛亥革命)이라면 우창봉기(武昌起义)가 먼저 떠오르실 것입니다. 마치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사건 하면 닐 암스트롱이 먼저 생각나듯이 말입니다. 우창봉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시안봉기 성공으로 비로소 청조의 멸망이 확정되었다고, 저는 그렇게 평가하고 있으므로, 시안봉기에 대해서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창봉기 직후 세워진 혁명군 사령부 (후베이성 우한)


당시 종루는 지금 같은 외딴섬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상상하기 어려우실 텐데, 그때는 종루를 중심으로 하여 정북 및 정동 방향으로 성벽이 이어져 세워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종루를 남서쪽 모퉁이로 하여 현재의 북대가(北大街), 동대가(东大街)와, 시안성벽의 북쪽성벽 및 동쪽성벽을 네 변으로 하는 직사각형 모양의 독립된 구역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안의 성으로서 만주족 팔기군의 구역인 이른바 만성(满城)이었습니다.      


청나라는 이른바 입관(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진입한 사건) 이후에도 계속 민족분리정책을 폈습니다. 한족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펴면서도, 그와 동시에 팔기군의 주둔지 및 거주지가 한족과 섞이지 않도록 애썼습니다. 이를 위해서 각 도시에 만성(满城)이라는 이름의 성을 새로 쌓았습니다. 이는 만주족의 상무성(尙武性)을 유지하고자 하는 고민 끝에 나온 일종의 고육지책이었습니다.     


당시 유목민들은 초원에서 등자 없이도 재갈만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매우 숙련된 기마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말 다루는 기술 하나로 중원을 휩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이 중원에 들어와 일단 정착하고 나면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정착한 유목민들은 미처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밀려 들어오는 다른 부족 기마부대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이번에는 그들 자신이 허무하게 무너지곤 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흉노족이 등장한 이래 중원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누르하치의 14남이자, 홍타이지의 동생이었던 예친왕 도르곤도 이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만성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도르곤의 이와 같은 민족 분리정책은 과연 성공했을까요?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려대로 역시나 팔기군의 전투력은 입관 이래 나날이 쇠퇴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안에 주둔했던 팔기군은 그나마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북방민족의 주된 침입 루트 중 하나가 섬서성 북편의 오르도스 지역(다른 하나는 황하를 건널 필요가 없는 산서성 대동大同 지역)이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시안에 정예를 배치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전력은 반드시 유지되어야만 했습니다. 청나라가 존속하는 기간 내내 시안의 팔기군은 각종 반란 및 전쟁을 진압하러 대륙의 이곳저곳으로 출동하면서, 전투경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팔기군은 귀족부터 노예까지, 전사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까지 포함하는 유기적인 공동체였습니다. 단순한 군사 조직 이상의 사회제도였습니다. 그들이 아직 만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다양한 이유로, 예를 들면 노략질을 통해 민간인들을 전리품으로 끌고 가기도 했기 때문에, 팔기군의 초기전력에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청조에 공을 세워 이름을 남긴 조선 출신 인물들도 여럿 확인됩니다. 1911년 시안의 팔기군 속에도 조선인의 후손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혁명을 지지한 신군이 봉기할 낌새를 미리 알아차린 고위 관료들은 재빠르게 도망갔으나, 청나라와 가족을 지키고자 했던 팔기군 병사들은 만성 안으로 후퇴하여 농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루를 중심으로 만성의 서쪽과 남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성벽이 무너졌고 이윽고 패배가 확실해지고 말았습니다. 함락 직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대학살이 있었다 없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바로 시점에 청조가 비로소 끝장났다고 생각합니다.     


청나라는 사실 꽤나 괜찮은 나라였습니다. 한족에게도, 이민족에게도, 사대부에게도, 농민에게도 말입니다. 과거의 그 어느 중원 왕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당나라 말고는 그에 견줄 수 있는 나라가 떠오르는 게 없을 정도입니다. 서태후 같은 희대의 악녀가 있긴 했지만, 청나라가 존속하는 기간 내내 그럭저럭 나라를 잘 운영했고, 현대중국에도 많은 귀중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렇게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리고, 중국에는 혼란의 군벌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안의 팔기군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건, 일견 이해되는 부분도 있긴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거짓말 같은 사건입니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 후인 1949년 5월 20일의 이른바 시안해방 때 후쭝난(胡宗南) 휘하의 25만 국민당 서북군이 무기력하게 무너졌습니다. 당시에도 이를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후쭝난이 공산당의 비밀 간첩이 아니고서야 그의 패퇴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봉건왕조 군주제보다는 공화제가 더 멋있다는 생각, 국민당보다는 공산당이 더 멋있다는 생각, 사람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져갔던 이 생각이 대세를 결정지었다고 봅니다.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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