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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끈한 콜라 Nov 30. 2023

풍경공원(丰庆公园) 단상

평양의 풍경궁과 시안 비행장을 떠올리다.

시안의 풍경공원과 평양의 풍경궁     


풍경공원(丰庆公园)은 2환로의 남서쪽 모서리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공원입니다. 이 공원은 시안성벽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서북대학의 서쪽에 있는, 서북공업대학의 서쪽에 있는, 대당서시의 서쪽에 있습니다. 시안에 살고 계신 분들이라면, 이제는 대충 그 위치가 머릿속에 떠오르실 것입니다.     

 

저는 우연히 이곳에서 전통 복식을 입은 소수민족 주민들이 전통 양식의 광장을 가득 채우고 흥겨운 춤을 추는 멋진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아하고 경쾌한 회전, 섬세한 손끝의 움직임, 그리고 조화롭고 리듬감 넘치는 음악은 저에게 신선한 쾌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멋진 광경을 이 공원에서 다시 볼 수는 없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지금은 휴일마다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지 않을지.     


이날 찍은 동영상을 외장하드에서 간신히 찾을 수 있었습니다. 풍경공원 2021.12.2.촬영


이 공원의 이름을 살펴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풍(丰) 땅의 경(庆)사스러운 공원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나라의 도읍지였던 풍(丰) 땅의  현재의 정확한 위치와는 거리가 약간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시안시민의 역사 사랑이 엿보이는 멋진 작명입니다.      


사실 저는 이 풍경공원에 올 때마다 고종황제가 평양에 건설하려 했던 행궁 풍경궁(豐慶宮)이 떠오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고종은 1902년 5월 6일 다음과 같이 발언합니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정한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옛 도읍으로서 예법과 문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비록 사람의 일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고장의 신령스러움 역시 논할 수 있다. …… 이제 평양에다 행궁(行宮)을 두고 서경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     


고종이 말하는 기자(箕子) 누구인지 희미하게나마 기억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스치고 지나가듯 배웠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불현듯 중간고사 주관식 문제에서 정답 ‘위만’ 대신 ‘기자’를 오답으로 쓴 친구도 기억나고, 위만이든 기자든 그들의 존재 때문에 저의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도 납니다.

      

기자는 상나라 마지막 왕의 숙부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그는 나라의 멸망하자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났고 주나라 무왕은 이 현자를 존중하여 그를 조선왕으로 봉했습니다.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만 흥미롭게도 조선의 지배층들은 이 옛이야기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정도전, 이퇴계, 이율곡 그 누구 할 것 없이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습니다. 기자께서 조선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비로소 미개함에서 벗어났다고 말입니다.


우리 민족이 성경 속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도 여럿 있는 바에야, 조선의 사대부들이 기자 전설을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하여 영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 바로 그때, 기자 전설을 이유 삼아 평양에 궁궐을 짓겠다고 나선 고종황제의 욕심과 무능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丰) 땅의 경(庆)사스러운 기운을 본인의 직계 후손들이 대대손손 누리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정작 그가 신경 써야 할 나라와 백성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서관공항(西关机场)의 옛 자리     


현재 시안으로 들어오는 대표 관문은 의심할 바 없이 함양공항(咸阳机场)입니다. 함양공항은 1991년에 개장하였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공항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서울로 치면 김포공항 같은 시내 공항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자리에 있던 서관공항입니다. 그전에는 시안 비행장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풍경공원이 딱 그 활주로의 중간이었습니다.


풍경공원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면, 옛 공항의 활주로가 남북축에서 대각선 45도의 각도로 자리잡고 있었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민항 아파트(民航小区), 성정부 가족아파트(省直机关丰园小区) 등 근처 아파트 단지 모양이 기울어져 있는데, 이게 모두 활주로의 존재 때문에 만들어진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덕지도 위에 활주로의 방향을 표시해 보았다.


장개석이 장학량에게 공산당 섬멸을 독촉하기 비행기를 타고 와서 착륙한 곳도 이곳이고, 송미령이 석방 협상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와 내린 곳이 이곳이며, 석방된 장개석과 송미령이 난징으로 떠나기 위해 비행기를 탄 곳도 이곳입니다. 30-40년대의 중요한 사건들이 이 비행장을 매개로 하여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1945.8.7. 김구선생님과 OSS 국장 윌리엄 J. 도노반은 시안에서 만나 한미공동군사작전을 최종합의하였다 출처:독립기념관
OSS국장 윌리엄J. 도노반이 주재하는 미군 작전회의에 참석 중인 철기 이범석(좌측 하단으로부터 두 번째) 출처: 독립기념관


뿐만 아니라, 미군 OSS 훈련을 받은 노능서, 장준하, 김준엽 선생님 등 광복군을 태운 더글라스 C-47 수송기가 이륙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선생님들을 태운 C-47 수송기가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때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로부터 사흘 후인 8월 18일이었습니다.


수송기는 여의도에 착륙하자마자 본국 귀환 명령을 받지 못한 일본군들에 의하여 포위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군 수송기를 공격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장해제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송기에서 내린 미군과 광복군에게 맥주와 음식을 정성스럽게 대접하고는, 다시 돌아가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미군과 광복군은 고민 끝에 다시 수송기를 타고 시안 비행장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의도광장 국기게양대 옆에 전시중인 실물 C-47 수송기 - 이곳이 당시 실제 착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라 한다. 2023.12.23. 촬영
2023.12.23. 촬영


시안에 다시 돌아온 선생님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아마도 참담하였을 것입니다. 학도병의 신분으로 일본군에서 탈출한 이래, 타지에서 수천 리의 장정을 거쳐,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이제 조국의 군인으로서 결전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의 심정은 말 그대로 참담하였을 것입니다.  

    

한 달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광복군은 분명히 국내 진공 작전을 감행하였을 것이고, 충칭의 우리 정부는 미군과 협력하여 국내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시작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소련군은 국경선을 건너 한반도도 들어오지 못하였을 것이며, 북한에 별도의 정부는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민족상잔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의 뇌 속의 지나친 상상일까요?     


시안의 광복군은 미군과 국민당 후쭝난의 지원을 받아 군대 흉내만 냈을 뿐이지 군사적 역량은 사실상 전무하여, 8월 15일이 되기 전 국내 진공 작전을 감행했다고 하더라도, 이후 그들이 역사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을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작은 움직임이 거대한 흐름으로 바뀌는 일은 인류의 역사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물론 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겠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가 저는 너무 아쉽습니다.      


광복군에 참여하셨던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감사하다 말하는 것 외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적이 희미하긴 하지만 시안의 광복군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이 후배인 우리들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시안에 장기체류하실 분들에게 일주를 권해드립니다. 특히 역사와 전통의 서북대학은 시내에 있으니 방문해보시기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올해 2023년은 고려대 총장이셨던 김준엽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 되는 해였고, 의문사하신 장준하 선생님의 서거 48주기였습니다)


그리고, 풍경공원에 산책하러 갈 때, 거기까지 간 김에 대당서시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 커피도 마시고 박물관도 가면 여러모로 좋습니다. 제가 자주 그렇게 했습니다. 다음 글을 대당서시에 대한 이야기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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