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상실의 과정
소신대로 살면 누군가와 부딪히게 마련이고, 내 소신을 묻어 놓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소신대로 살면 내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기 때문에 내가 소멸되지 않고, 건강한 나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내 소신을 접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다 보면 평화는 누리지만, 내가 자꾸 소멸되고, 건강한 나로 살아갈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리고 여기다가 덤으로, 억눌러진 나가 언제 이상한 모습으로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 여러 사람을 만나면, 같은 상황에서도 다양한 반응과 대처를 하는 서로 다른 색깔의 사람을 경험하게 된다. 누가 맞고 누가 틀렸냐는 없다. 그저 나의 기준에 맞거나 맞지 않을 뿐. 내 기준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옳은 기준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다.
그저 모두가 각자의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뿐이다. 내가 보기엔 영 이상하고, 지나치다 싶어도 다른 누군가가 보기엔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내게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 다른 누군가에겐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렇게 다르니,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은 일치하는 게 이상할 정도다. 내 소신을 저버리고 상위자에게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어느새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급기야 나 자신에게 '나는 노다'라는 주문을 넣을 정도가 된다. 나는 뱃사공이 아니고, 배를 조종하는 키도 아니며, 그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노에 불과한 것이다.
내 의견을 말해도 수용되지 않는 여러 번의 경험을 하고 나면, 무기력하게 된다.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시점이 오면, 그 무기력함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중대 사안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처리되고, 마치 고요히 움직이는 거대한 조류처럼, 흘러는 가고 있지만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흐름 속에 내가 묻혀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할 뿐이다. 바로 그때 나는 내가 더 편해지고자 소신을 저버리고 생각도 멈추고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로 변신한다.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누군가가 있을 테지만, 그에게 나는 하나의 부속품으로써만 기능한다.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화려한 색깔의 버튼을 나는 조작할 수 없다. 버튼이 눌러지면 나는 움직여야 할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분노한다. 나 자신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아니면 거대한 기계의 일부를 파괴하고 싶은 마음도 들 수 있다. 때로는 화려하게 번뜩이는 그 버튼을 내가 직접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조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게 되는 답답함이다. 조직을 위해서, 대의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중에서도 마음 약하고 조종당하기 쉬운 사람들은 권위자들의 그물에 걸려서 생각이 필요 없는 톱니바퀴가 된다.
호구가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호구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껏 살아남았다. 호구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나의 이번 재계약은 물 건너갈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구슬릴 줄 모르는 사람은 꾸역꾸역 혼자서 일을 하다가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이 난다. 혼자라는 생각에 외롭다. 화도 난다. 그래도 해야지, 다른 방법은 없다.
누가 그랬다. 그래서 월급을 주는 거라고. 회사는, 직장은, 고통스러운 업무에 대한 대가로 달마다 월급을 지급하는 거라고 그랬다. 마땅히 겪어내야 하는 고통이라고. 이 고통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편해 보이는 사람이 얄미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두가 똑같지 않고, 다 다르다. 화는 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나에겐 이 직장이 필요하고, 매달 나오는 월급이 소중하니까. 내 정체성이 좀 깎여서 나 자신이 소멸되어도, 주말에 열심히 회복하고 다시 직장 속으로 가야 한다. 지켜야 할 소중한 가족들이 있으니까.
이런 푸념도 어느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일 것이다. 결국 직장이 있어도, 직장이 없어도, 삶의 괴로움은 어디에나 있다. 당연한 소릴 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