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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Feb 18. 2024

고래자리

그 페이지는 내가 다시 펼쳐보기 전 까지, 30년을 넘게 접혀 있었다.

김영사는 지금도, 그 시절에도 좋은 책을 많이 만드는 좋은 출판사였다.



이번 트레바리 모임 주제는 <코스모스>였는데, 그러다 보니 별자리에 관련된 얘기가 나왔다. 나는 칠판에 겨울철 대삼각형을 그리고, 오리온 자리를 찾는 법을 설명했다. 


마나님과 주말 저녁에 와인을 따라 놓고 노닥노닥 이 얘기를 하다, 문득 이 책을 서가에서 꺼냈다.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 어린 시절 읽었던 책 중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책이다. 


고등학생 때였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늦게 귀가를 하다 동쪽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을 발견했다. 그 별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음 날 서점에 들러서 이 책을 샀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성도(星圖)에는 그 별이 없었다. 


잘못 보았을까? 혹은 내가 성도를 잘 못 읽는 걸까? 다음 날 하늘에서도 이 별을 발견한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쳐보았지만 날이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당시엔 핸드폰 플래시 같은 건 없었다) 일단 포기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방에서 다시 펼쳐본 책에도 그 별은 없었다. 인공위성이었던 걸까? 지금이라면 인터넷을 이용해서 한 방에 그 별을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은 없었다. 


나는 당시에 PC통신 계정을 갖고 있었는데(당시 PC통신은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운영하는 KETEL 뿐이었다) 모뎀으로 KETEL에 접속한 후  천문 동호회 채팅방을 찾아 들어갔다. (여담이지만 놀랍게도 KETEL 천문 동호회 회장은 이 책의 작가인 이태형님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열명 내외의 사람들이 접속해 있었다. 나는 나를 소개한 후, 내가 동쪽에서 발견한 밝은 별에 대한 질문을 했다. 몇 개 후보군이 거론된 다음, 금방 의견이 모아졌다. 내가 발견한 별은 별이 아니고, 태양계 내 천체인 목성이었다. 그래서 성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이 책과 별자리들을 꽤 깊게 파게 되었다. 지금도 밤 하늘을 쳐다보면 계절 별 주요 별자리들 구분해 낼 수 있다. 지금은 쉬고 있지만, 캠핑장에서 별자리를 찾아내고 마나님에게 별자리에 얽힌 얘기를 해주는 것도 우리들의 컨텐츠 중 하나였다. 



이 페이지는 내가 다시 펼쳐보기 전 까지, 30년을 넘게 접혀 있었다.




얘기가 또 길어졌는데, 실은 내가 원래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고. 


문득 펼쳐본 이 책의 한 페이지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그 페이지는 가을철 대장 별자리인 페가수스 자리를 이용해서 고래자리를 찾는 방법을 설명하는 페이지였다. 


그 페이지를 앞 뒤로 읽어보았지만 왜 이 페이지를 접어 놓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왜 고래자리를 찾으려고 했던 걸까? 


고래자리는 무척 커다란, 인상적인 가을철 별자리이지만 알파별이 2등성인 어두운 별자리라 서울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기가 깨끗하고 빛공해가 적은 캠핑장에서나 보일까. 


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 페이지를 접은 채 두기로 하고, 오늘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그 시절의 나는 왜 고래자리를 찾으려 했던 걸까?" 라고 적었다. 


나중에 다시 이 페이지를 펼칠 일이 있다면 거기에 답을 적을 수 있을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오랜만에 소년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난, 귀중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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