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하루 세끼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다.” 고등학교 때 은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돈 많은 재벌도 평범한 서민도 하루에 세 끼를 먹는다는 논리였다. 하기야 재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루에 다섯 끼, 여섯 끼를 먹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먹어대다가는 비만이 되거나 그로 인한 병에 걸려 제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술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소주 마시고 취한 사람이나 비싼 양주 마시고 취한 사람이나 취해서 기분이 좋은 것은 똑같다.” 라고도 말씀하셨다.
분명히 맞는 말씀 같다. 하루 세끼는 평등하지만 우리는 그 하루 세끼를 위하여 매일 매일 밥벌이를 해야만 한다. 아마도 밥벌이라는 행위는 우리가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는 반복해야만 하는 운명과도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항상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밥이며 정말 징글징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행위를 멈출 수 있는 수단은 오직 죽음밖에는 없다. 그래서 밥에는 대안이 없다. 김훈작가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에는 밥벌이에 대한 지겨움과 절절함이 쓰여있다.
지긋지긋 하지만 밥을 먹기 위해서 우리는 밥벌이를 해야만 한다. 내가 먹어야 하고 내 가족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밥벌이를 위해 거리로 나간다. 내가 아무리 힘들고 지치고 아파도 나는 밥벌이를 하러 나가야 한다. 그래야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밥은 슬픔의 결정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은 말할 수 없는 기쁨임과 동시에 슬픔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가? 다른 대책은 없는가? 대책은 없다. 어린 나이에 이미 엄청난 상속을 받은 미국의 어느 유명한 여배우가 “사람들이 취미가 아닌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지 몰랐다.” 라고 토크쇼에서 말했다가 뭇매를 받았다. 이런 사람들은 제외다. 그저 부럽다.
나는 오랜 시간을 김밥, 라면, 칼국수, 설렁탕, 백반 같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부대찌개, 대구탕, 삼겹살도 먹고 싶었지만 이런 음식은 보통 두 사람 이상이어야만 주문이 가능하다. 그래서 혼자서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내 정서에 맞다. 나는 낯선 도시에 가서 끼니를 해결할 때면 주로 허름한 간판의 식당에 가서 먹는다.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 되었지만 경험적으로는 대체로 어긋나지 않았다. 수많은 음식의 메뉴판이 붙어있는 식당은 미련 없이 걸러야 한다.
밥을 먹는 행위에도 구별이 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먹는 밥은 식사의 의미도 있지만 대부분 사교나 친교가 목적이다. 그들은 한껏 자신을 뽐내려고 그곳에 온 것이지 잘 차려진 뷔페를 배불리 먹으려고 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러나 김밥이나 라면을 파는 식당에 오는 손님의 대부분은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오는 사람들이다. 혼자서 먹는 경우가 많지만 행여 자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합석을 하여 모르는 상대방과 마주보며 어색하게 먹어야 하는 김밥과 라면과 단무지는 쓸쓸하다. 왜냐하면 나는 사교를 목적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면 나는 다시 밥벌이에 나선다. 나를 밥벌이의 전쟁터로 내모는 것은 외부의 사람일 수도 있고 나 스스로일 수도 있다. 학교에서 노동은 신성하다고 배웠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사회는 노동을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사람들을 밥벌이에 내몰고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붙인다. 지금까지 죽도록 열심히 밥벌이를 했다. 이제 좀 쉬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화가 난다. 그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들이 밉다. 밥벌이라는 이따위 행위를 지금 당장 그만두고 싶다. 그런데 대책은 있는가? 대책은 없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