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준,,,
독서모임을 같이하는 친구에게 책을 선물 받아서 읽게 되었다. 부산여행을 갔다가 독서모임을 위해서 책을 사 왔다고 한다. 이렇게 책을 선물 받은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고 여행을 갔다가 독서모임이 생각이 나서 선물을 준비했다는 마음이 너무 감동이었다. 그래서 더 빨리 읽고 싶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책 선물은 받는 사람의 취향의 책이 아니고 읽는 사람이 읽고 싶어 해야지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선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 한번 읽고 나중에 생각나서 다시 읽게 된다면 그 사람을 다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활자로 찍은 책은 잃어버리고 불타지 않는 이상 항상 존재하고 더욱이 준 사람은 평생 기억날 것이며 선물을 받는 순간은 감동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자리 밑에는 마치 비가 온 것처럼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 다. 비도 눈도 오지 않은 날이었다.
정체성은 늘, 그리고 항상 상처에 뿌리를 두게 된다. 라캉이었던가?
“버려야 하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 "굳이 버리지 않아도 돼. 그곳에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 단순하게 청소를 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무언가를 느꼈다. 나도 사실 버려야 할 기억들을 잊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버려야 할 기억들을 잊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가. 버리는 것과 잊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 문구를 읽으면서 버리는 것은 그 기억들을 놓아주는 것 같다. 또는, 그 기억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고통이었던 기억들에게서 해방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버리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란 잠시 눈을 돌리고 회피하고 있는 것과 같다. 모든 감정과 기억은 나쁜 것은 없다. 느끼지 않은 감정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며,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라도 언젠가 알게 모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것은 고통이든 행복이든 감정을 느끼고 기억으로 남기고 보내는 것이다.
“나는 긴 줄에 서 있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줄이야. 늘 그 줄에 서 있었어. 그 줄에 끝이라는 게 있을까 따위는 고민해 본 적도 없었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 멀리서 어렴풋이 끝이 보이는 것 같은 거야. 그 줄에 끝이 있다는 걸 알자마자 나는 두려워져 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데, 아무도 나가지 않아. 나만이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리고 문득 그 줄의 끝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
→ 삶은 외줄 타기이다. 난 외줄을 타는 광대고. 일단 줄을 탄다. 갈길은 앞과 뒤뿐이기에 앞으로 간다. 어차피 매우 긴 줄이기에 끝을 생각하기보다는 현재에 주어진 길을 간다. 하지만 매우 얇은 줄로 매 순간순간이 불안하다.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그 끝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일단 살아가기 때문이다. 괜한 피해의식과 두려움으로 줄을 나가면 그걸로 난 끝이다. 그러기에 나는 끝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얇은 줄을 어떻게 하면 잘 탈 수 있을지 고민하기로 했다. 혹여나 그 줄의 끝을 알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광대의 자질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제나 확신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무심코 확신했다가 기대처럼 되지 않으면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해 버린다.
→ 나는 항상 ‘만약에’라는 생각을 달고 산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의 n번째 경우의 수를 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기대, 예측을 벗어날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너무 큰 기대를 하지도 않는다. 기대로 부푼 풍선이 나무 위에서 터질 때랑 하늘에서 터질 때랑 그 고통은 상상이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고 확정시켜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사람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방해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어차피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이 해이하게 만들고 의욕을 깎아낸다. 무슨 일을 하든 실망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인드가 필요할까.
“모두들 아파 트 설계 도면처럼 살아가느냐고.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사느냐는 말이야. 너는 네가 특별히 불행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내가 보기엔 다른 사람들이랑 비슷비슷해.”
산다는 것이 마치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언젠가 조는 말했었다. 이쯤에서 의미 있는 대사를 던져야 할 것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고. 그러지 않으면 슬슬 졸작이 되어버릴 텐데, 도대체가 할 말이 없어서 문제라고. 사는 것 자체에 그다지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인생은 영화인가. 다들 내 인생을 보고 있는 대중들을 실망하게 할 수는 없지. 어떤 대사를 쳐야 관객이 웃고 울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맞다. 그리고 그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맞다. 그것도 하나의 행복의 지표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반응을 잣대로 내가 내 인생에 재능이 있고 없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생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말일까. 주위를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 천지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정말로 인생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닐까. 가끔은 그 재능이 부럽다. 어느 분야의 재능이 있어도 부러운데 인생 사는데 재능이라니! 그렇다고 해서 어느 분야든 재능이 있는 사람들만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조금 더 잘 살 수 있다고는 해도 재능이 없어도 살 수는 있다. 나도 인생 사는데 재능 좀 갖고 싶다.
나는 걔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사랑받는 내가 필요했던 것뿐이었 어. 별 볼일 없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읽는 내내 힐링받는 느낌이 들었다. 잔잔한 필체. 자극적이지 않는 음식을 맛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력하게 독자를 놀라게 하거나 감동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읽으면서도 혼자 감성이 올라오게 하는 책이었다. 서점 주인분이 나이에 맞는 도서를 추천해 주셨다고 했다. 부산의 ‘우연한 서점’ 나중에 꼭 가보고 싶다.
24살의 ‘나’에 나를 이입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처한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가 반지하에 사는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의 감정에 맞춰서 어느새 나는 ‘나’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이 마냥 부정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차분해진 기분을 나쁘게 말하면 우울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온몸의 힘을 빼내게 도와주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온전히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의 경우에는 기분이 좋을 때보다 우울할 때, 무언가에 집중을 잘할 수 있다. 책에서 그러한 감정을 주다 보니 더 쉽게 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하나의 장면, 영화처럼 그려보는 습관이 되어있다. 이 책은 나만의 영화를 쉽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양이들의 움직임, 조의 가게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렇게 상상하게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책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들이 굉장히 많았기에 이러한 점들에 있어서 더 감성 있는 책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한테 좋은 책을 선물 받았다는 것이 굉장히 행복했고 그 행복한 감정을 가진 채로 책을 읽었기에 끝까지 행복한 기억만 가지고 책장을 덮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러한 담백한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