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혁명정신을 가릴지언정
전근대 미국미술의 서막 2편
미국전근대미술의 발전상을 미국독립혁명 전후(pre-revolutionary era, post-revolutionary era)로 나누어 살펴보면 가장 큰 특징으로 작품의 관람대상이 변화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유일한 미술장르였던 초상화는 개인적 소장을 목적으로 집안 내에서 보관되고 유산되었음에 비해 독립혁명 후 제작된 전근대미국미술 작품들은 전시를 목적으로 대중에게 선보여졌습니다. 새로이 탄생한 공화국에서 누가 정치적 패권을 장악하느냐 하는 것은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고 이에 독립혁명 이후 일부 미국미술은 다수의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미국미술은 독립적으로 미국미술이라고 칭할만한 어떤 미술양식적 바탕이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유럽미술 전통을 양식적으로 따르고 있었을 뿐 미국미술이라고 명명할 특정 미술양식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존 트럼블 <벙커힐 전투에서 워렌 장군의 죽음> after 1815–before 1831. Boston Museum미국 미술 아카데미 초대 교장으로 재직하며 화가이자 교육자로 미국 전근대 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한 미국화가 존 트럼블(John Trumbull, 1756-1843)의 <벙커힐 전투에서 워렌 장군의 죽음 The Death of General Warrant at the Battle of Bunker’s Hill, June 17, 1775> 역시 전통적인 유럽미술 역사화의 틀을 빌려왔습니다. 특히 작품 오른쪽 하단에 보이는 백인군인과 그에 반쯤 가린 흑인의 모습은 17세기 네덜란드 초상화에서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획득한 부의 전유물로 흑인노예를 백인 뒤에 그리기 시작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흑인 도상은 18세기 영국의 초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조슈아 레이놀즈의 <스탠호프 백작 초상화> 속 주인을 모시는 충성스러운 하인 마커스의 모습을 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트럼블이 처음 이 작품을 계획할 때만 해도 두 명의 병사가 각자 스스로의 무기를 들고 싸우는 장면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그려진 두 명의 독립군은 이후 최종 버전에서 사라져 버렸는데요. 그 결과 칼을 들고 용맹하게 영국군에 맞서는 백인군인 뒤에 가리어진 흑인의 모습은 주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수동적 존재가 되었고 동시에 벙커힐 전투에서 투쟁한 수많은 흑인병사의 역사를 지우게 되었습니다. 트럼블은 흑인을 물질화했던 유럽전통의 흑인도상을 미국독립전쟁의 최전선에 가져다 놓는 선택을 하여 이 진부한 도상에 새로운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부여했습니다. 덕분에 독립전쟁 참전의 주역인 이 흑인시민은 흑인군인이 아닌 노예로 형상화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공화국의 패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영리하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야말로 미국전근대 미술의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비록 정치적 함축을 머금은 이 도상으로 말미암아 미국독립전쟁의 정신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새로운 미술사조의 탄생은 양식적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이후 미국미술의 흐름을 고려한다면 작가의 깨어있는 선택으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트럼블은 기존의 유럽미술 도상에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해 유럽미술과 영미미술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 성공하고 더불어 미국만의 미술적 독립을 선언했음에 그 기여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18세기 영국미술이 외래 미술장르인 풍경화를 그들의 초상화에 삽입하여 서서히 풍경화라는 장르를 영국의 것으로 재탄생시킨 것처럼 같은 시기 태평양 건너 18세기 영미미술 또한 본국의 전통, 혹은 유럽미술의 전통에서 서서히 탈피하면서 전근대 미국미술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참고문헌
Margot Minardi, Making Slavery Hist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Wendy Bellion, Citizen Spectator: Art Illusion and Visual Perception in Early National America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