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같은 건 없어.
방금 전 지혜가 첫 성관계를 끝낸 뒤의 감상이었다.
애달픈 감정이 살짝 찢어진 자루에서 새어 나오는 밀알처럼 조금씩 쏟아지다가 종국에는 찢어진 곳이 너무 커져버려 어쩔 도리 없이 상대의 육신으로 손이 뻗어가 이성을 배반한 몸짓으로 두 몸체가 꼼짝없이 한 몸이 되는 것이라, 하지만 이 모든 건 환상이란 제목으로 미려하게 장식된 예술품에 불과했다. 현실은 그저 차가웠다.
무언가 참을 수 없게 가렵다. 지혜는 구겨진 시트 위에서 가만히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결국 단 잠에 골아 떨어진 그를 두고 밖으로 향했다. 아무 곳이나 좋았다. 지금 이 장소가 아니라면 그 어디든 좋았다. 도망치듯 방을 나와 프런트까지 향했다. 남자와 둘이 방문해 새벽에 몰래 혼자 나가는 여자와 졸고 있는 모텔의 직원이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못 볼 것을 본 마냥 시선을 거두었다. 어색한 마주침을 뒤로하며 모텔의 정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거리가 어두웠다. 당연히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적막하고 무서워 보여도 밖으로 나갔다. 분명 평상시의 모습과 다른 거리의 풍경에 여러 감상이 들어야 했지만 무감각했다. 아까의 자극이 그렇게 만들었다.
모텔에 구비되어 있던 싸구려 비누 냄새가 차가운 공기와 함께 전신을 맴 돌아 괜히 숨을 참으며 걸었다. 한참을 걷는데 그만 목적지를 정해야 하는 길목에 닿았다. 운이 좋게 모텔과 사는 집의 거리가 가까웠다. 큰 수모 없이 집까지 걸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새벽에, 그것도 낯선 냄새와 경험이 잔뜩 묻은 여자아이가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끔찍한 공포였다. 결국 서둘러 목적지를 바꿨다. 근처의 산책로였다.
지혜는 애정이 묻은 취미가 많았다. 그 중 산책은 단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취미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늘 상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걸었다. 왜 그렇게 걷는지 본인도 이유를 몰랐지만 몸과 정신을 이루는 체세포의 집합체가 좋아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익숙한 길에 들어섰다. 한창 봄을 맞이한 풍경은 무언가를 밀어내고 싶은 사람에게 제격이었다. 씻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보고 걷기를 반복했다. 지나온 길이 꽤 되었음을 눈치 챘을 때는 발뒤꿈치에 아릿한 고통이 느껴질 때였다. 그래도 지혜의 걸음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즉시 아까의 생각과 느낌이 찾아올 것 같았다. 이만 돌아가야 해. 머리가 그렇게 말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정체 모를 목소리가 들렸다.
- 음, 지혜 씨.
지혜는 순간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온통 가로수뿐이었다. 이상했다. 잘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분명 톡톡히 들었다. 아주 미성의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그렇지만 확신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약간의 인지 부조화가 오는 찰나였다.
- 지혜 씨, 저 여기 있어요.
불현듯 한 번 더 들렸다. 아까보다 더 힘이 있었으며 소름 돋을 정도로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아주 사랑스러운 연인을 대하는 것 마냥. 꽤나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존재의 근원이 전혀 보이지 않자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시작된 불안은 순식간에 마음을 연소시켜버렸다. 그때였다.
- 여기, 여기에요!
불시에 소리가 높아졌다. 순간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혼비백산한 지혜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쿵쿵쿵,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뛰었다. 높아진 귀 울음에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 생리적인 발작을 뚫고 미지의 음성이 들렸다.
- 아아, 무서워하지 말아요.
쿵쿵쿵.
- 절대로 해치지 않아요!
쿵쿵쿵.
- 그러니까 눈 좀 뜨고 일어나요.
쿵쿵쿵.
- 지혜 씨.
쿵쿵.
- 그만 일어나서 제발,
쿵쿵.
- 제발 저 좀 봐주세요.
쿵,
지혜는 얼굴을 감싼 팔을 치우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가로수였다. 땅바닥에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갈색의 몸통을 지니고 가지마다 잎과 꽃을 피어낸 벚나무.
말도 안 됐다. 이 차가운 현실이 말이다.
***
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제 이야기로 지혜 씨와 함께하는 이 소중한 시간을 쓰고 싶지 않네요. 그래도 궁금하신 건 가능한 다 말할게요. 그렇지만 지혜 씨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저를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혜 씨를 봤듯이 말이죠. 아, 저는 이 자리에서 지혜 씨를 매일 보았어요. 지혜 씨는 날씨가 궂은 날도 빼놓지 않고 이곳으로 항상 산책을 나오더라고요. 오늘은 언제 오나, 내일은 오나, 내일은 언제 올까, 그 다음 날도 올까, 하다가 지혜 씨가 너무 궁금해지게 되었네요. 이게 무슨 뜻이냐고요? 으음, 그러니까 이 말 뜻은 말이죠, 제가 점점, 지혜 씨를 감히, 제 주제에, 좋,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뚝, 머릿속에 재생되던 영사기의 필름이 끊겼다. 현실의 의식이 침투되자,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 선영을 만났을 때는 중학교 시절이었고, 그녀는 중학교 시절 그대로 허리까지 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머리결에서 선영이의 집에서 애용하는 린스 향이 미약하게 퍼졌다. 그 냄새를 맡을 때면 지혜는 이유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모텔에 남자친구만 덜렁 놔두고 왜 갑자기 집으로 간 거야?”
선영은 플라스틱 빨대를 휙휙 저으며 물었다. 지혜는 물어본 질문에 모르겠다, 대답했다.
“모르겠으면 그냥 헤어져. 난 그 오빠 꼬라지 영 마음에 안 들어.”
꼬라지. 언젠가부터 선영이 그를 말할 때 쓰는 단어였고 선영의 성격답게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했다. 생긴 꼬라지, 입는 꼬라지, 말하는 꼬라지, 너에게 하는 꼬라지 등등.
“그보다 피임은 확실하게 한 거지? 혹시 나중에 콘돔 빼자고 하면 바로 걷어 차. 그런 사람이랑 너랑은 안 어울려. 너? 넌 선비 같은 사람이랑 어울릴 거 같은데. 아니 그런 꼰대 말고. 반듯하고 점잖은 사람 말이야. 하하, 맞아. 선비는 옛날에 다 죽었지.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너한텐 그런 사람이 어울릴 것 같아. 다 내 생각이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지혜는 빨대를 쭉쭉 빨았다. 미지근한 플라스틱의 온도가 순식간에 음료의 차가운 성질로 변했다. 그와 달리 창가에서 내리쬐는 볕이 따가웠다. 따스함에 이끌려 유리창 너머를 내다보자 그 전에는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을 존재들이 푸르게 서있었다.
살다 살다 나무와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꿈도 못 꿨는데, 대화의 내용은 벌어진 일보다 더 황당했다.
- 알아요.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거. 제 욕심 때문에 지혜 씨만 곤란해졌네요. ……있잖아요, 우리 이렇게 할까요? 제가 조금이라도 궁금해지면 다시 여기로 찾아오세요. 저에 대해 모두 알려드릴 테니까요.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신사적인 태도의 가로수는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아버렸다. 지혜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아마 숨이 턱 끝까지 찰 정도로 집으로 뛰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기막힌 일을 앞 사람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실화라고 해도 괴담 같은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괴담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선영은 단연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줄곧 언어가 되지 못하고 입안에서 빙빙 맴돌았다.
할 일이 바쁜 선영을 결국 붙잡지 못했다. 카페에서 선영과 헤어진 지혜는 혼자 길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미친 척하고 그들 중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을 깨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나무일 뿐이었다. 그 가로수만 유일하게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니 더 고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