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팔론산두르 해변과 헬리산두르 마을
아이슬란드 서부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몹시 추웠다. 만만하게 보았던 아이슬란드의 추위를 제대로 맛보았다. 차창 밖의 풍경조차 춥다. 장벽처럼 높이 솟은 산은 산맥을 이루어 달리고 거친 바위와 크고 작은 돌이 굴러 내려오다 멈춘 듯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우울하고 무거운 하늘에 맞닿은 산능선은 그린 듯 우아하고, 나무도 없이 메마른 산등성이는 의연히 북국의 찬바람을 감당하고 있다. 가릴 것 없이 벌거벗은 그대로의 모습은 거대하고 웅장하나 황량하기 그지없다.
풍경이 참 외로워 보인다. 풍경 위를 달리는 스산한 바람조차 외로워 보인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적 쓸쓸함이 느껴져 가슴이 저릿해진다. 거대함과 외로움.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바라보며 나는 아름답다 생각한다. 황량함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가슴 시린 아름다움도 있음을 깨닫는다.
듀팔론산두르 해변에서 노을 지는 겨울 바다를 감상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파도는 순식간에 해변을 거슬러 올라온다. 해변에는 검은 자갈과 모래밭이 길게 펼쳐져있다. 화산석인 현무암이 쌓여 만들어진 검은 모래 해변은 아이슬란드 곳곳에 있다. 해변이 아닌 곳은 화산의 영향으로 검은 흙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검은 흙길이라면 석탄을 연상하고 발디디기가 조심스러워질 법도 하다. 그러나 이곳의 검은흙들은 흰모래만큼이나 깨끗하다. 긴 해변을 걷는 동안 디딜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모래 알갱이가 커져 자갈밭이다. 새카맣고 동글동글한 돌멩이들이 소복이 모여있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곳은 검은색도 깨끗함을 갖고 있으며 황량함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는 특별한 영역이다. 나는 지구 맞은편에 와서 진정 새로운 걸 만났다.
헬리산두르라는 작은 어촌에서 점심을 먹었다. 소규모 전시관과 휴게공간, 식당을 겸하고 있는 곳이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옆 전시실을 들렀다. 약간의 기념품이 있고 벽에는 아이들 그림이 걸려있다. 거대한 빙하나 지각의 균열을 소재로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아이슬란드만의 독특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사람을 중심으로 크게 그리고 주변 풍경을 실제보다 작게 그리는 것과 대비된다. 내가 캬플라비크 상공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며 느낀 바로 그 감정을 이곳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체득하고 있나 보다.
이곳의 자연은 장대하다. 들판에 서면 ‘넓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광막함과 마주하게 된다. 지평선은 아주 멀고 낮다. 하늘을 가득 채운 진회색의 두꺼운 구름은 지상 가까이 성큼 내려와 세상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그에 순응하듯 집들은 나지막하게 지어졌는데 구름은 집 지붕을 스치며 유유히 흘러간다. 여기까지가 하늘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곳은 신들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에게 잠식당한 지구의 한 귀퉁이, 인간의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섬에서 자연을 거느린 신들은 인간의 잠식을 버티며 먼 옛날의 빛바랜 영광을 반추하고 있다. 그곳에 깃든 인간은 여전히 미약하고 왜소한 생명체일 뿐이며 거대한 자연 속에서 겸손히 살아가고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어 휴게실로 갔다. 매점을 지키던 머리 희끗한 중년 여인이 주문을 받았다. 잠시 후 덩치가 큰 젊은이가 감자와 당근을 갈아 만든 따듯한 수프를 들고 나왔다. 이어서 대구요리도 나왔다. 순박하고 어려 보이는 젊은이는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식사가 어떠냐고 쑥스러워하며 묻는다. 다들 엄지 척을 해줬다. 신선한 대구의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맛을 기름기 없이 담백하게 요리해서 다들 맛있다고 감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식재료인 생선은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나가 막 잡아 온 걸 사용하는데 대구가 주로 잡힌다고 한다. 설명을 마친 주방장은 상기된 얼굴로 기분 좋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들으니 중년 여인과 젊은이는 모자(母子) 간이라고 한다.
작은 어촌의 소박하고 맛깔스러운 한 끼 식사는, 낯선 이의 다정한 환대를 받은 것 같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황량한 땅, 거친 바람이 부는 해안 가의 나직한 집집에서는 이런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도란도란 인간의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눌 것이다. 신들의 영역은 무심히 버려둔 채.
레이캬비크에서는 숙소 옆에 티요른 호수가 있어 자주 산책하러 나갔다. 호수 위에는 백조와 오리가 뒤섞여 사이좋게 물 위에 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호수 주변이 얼었다. 백조와 오리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얼음 위를 걷거나 채 얼지 않은 물 위를 헤엄친다.
사람들도 비슷하다. 날씨 변화에도 무덤덤하고 일상적인 감정표현도 별로 없다. 일조량이 부족한 탓인가 싶다. 태양은 온종일 짙은 구름 속에 숨어있다. 일몰 즈음이 되면 잠시 붉게 빛나다가 곧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10시가 되어도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고, 4시가 지나면 밤이 슬그머니 들어선다. 낮조차도 햇빛 쨍한 맑음이 아니라 짙은 구름 뒤에서 흐릿한 빛을 보낼 뿐이다. 오히려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산마루에서 환하게 빛나는 햇살이 태양의 존재를 알려준다.
귀국 비행기가 공항에 가까워져 눈을 뜨자 눈 부신 햇살이 나를 맞이한다. 익숙한 풍경을 보며 내가 지구 반대편에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르고, 하루종일 온 세상을 비추고, 저녁이면 서쪽 하늘을 물들이며 내일을 기약하는 곳이다.
익숙한 풍경 속에 늘 함께 한 빛. 모든 곳이 빛으로 채워져 있다면 어떻게 빛의 존재를 고마워하겠는가. 죽음 같은 어스름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까마득히 먼 곳일지라도 산꼭대기 한 자락에 빛이 내리는 게 보이면 그곳을 향한 모든 시선이 빛의 존재를 알고 열망하게 된다. 아이슬란드가 빛의 나라인 것은 오로라 때문만은 아닐 거라 생각된다. 문득 아이슬란드의 여름 풍경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