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성 정체감 장애, 그리고 죄의식
장화, 홍련(2003)
-해리성 정체감 장애, 그리고 죄의식
평점: ★★★★★
<장화, 홍련>은 2003년에 상영된, 김지운 감독의 공포영화이다. 한국 공포영화는 1998년 <여고 괴담> 이후 200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다. 가부장제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억압에서 개인과 사회의 부당함, 모순에 대한 원한으로 확대되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각 주인공과 장면에 관하여 분석할 것이다. 따라서,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독자들은 이 페이지를 영화를 본 후에 읽어주길 바란다.
영화는 의사와 수미의 정신과 상담에서 출발한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비어있는 공간은 수미의 공허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지?” 수미에게 묻는다. 영화 속에서 수미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다. 마지막에 중성적인 회색 정장을 입은 은주가 들어오기 이전까지, 일본식 가옥에 머물었단 이는 단 두 사람이다, 무현과 수미. 그 전까지 굴곡이 드러나는 페미닌한 옷을 입은 은주는 모두 수미의 욕망이 투여된 ‘은주’의 모습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영화 속에서 부자연스럽고 기괴하게도 느껴지던 은주의 행동이 이해될 것이다. 수연은 수미가 일방적으로 챙기고, 보살피는 대상이다. 수연은 사고로 죽은 수미의 여동생으로, 수연 역시 수미가 환상으로 만들어낸 대상이다. 수미의 또 다른 ‘자아’인 수연은 영화 속에서 내내 말이 없고 조용하다. 아기처럼 소리를 질러 의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필자 역시 황혜진 영화 평론가와 마찬가지로, 수연과 수미의 관계에서 에로틱한 시선과 동성애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1] 한 침대에 누워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나, 함께 끌어안고 누워있는 두 소녀가 이불을 들춰 올리는 장면까지.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 연구에서는 수미가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엘렉트라 콤플렉스)를 투여한 ‘은주’, 그리고 그 본능을 억제하고자 하는 ‘수미’, 이 욕망에 속죄하는 ‘수연’으로 크게 자아가 나뉜다고 보았다.[2] 사춘기를 겪는 수미에게 생모의 죽음은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해소될 수 없는 조건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수미에게 아름답고 젋은 여자인 ‘은주’는 증오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금기시된 욕망은 수미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였고, 수미의 죄책감이 강해질수록, 은주(수미)는 더욱 악질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런 점은 모두 영화 속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가족의 저녁 식사에서 무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 샷이 있다. 이 샷에서 은주와 수미가 무현을 중심으로 양측에 위치한다. 이는 형식을 통해 은주와 수미가 무현을 두고 경쟁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로, 수미가 무현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무현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불을 덮어주는 모습과 달리, 손등으로 무현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수미의 모습은 어딘가 거북하게 느껴진다. 수미가 무현의 얼굴을 쓸어내리자마자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죄의식을 느낀 수미의 앞에 은주(수미)가 나타난다.
즉, 은주와 수미, 수연은 모두 수미의 자아이고, 이들이 곧,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점은 많은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꽈리 열매 앞에서 머리를 흔들던 수연-어두운 방에 들어선 수미가 창 앞에서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굉장히 유사하다.
2. 수연, 수미, 은주가 모두 같은 날짜에 정혈을 시작한다.
3. 수미와 은주가 말다툼하는 장면: 무현의 면도 장면이 잠시 등장한다.
4. 물을 틀어 놓은 사이, 은주가 할 법한 말이 수미의 목소리로 들린다. 이러한 직접적인 힌트는 관객이 바로 알아채지 못하도록 물소리라는 장치로 한 겹 숨겨 놓았다.
5. 이어진 장면에서 분을 참지 못한 수미가 찻잔을 모두 깨버렸지만, 식탁에 은주는 없었다. 도망가는 수미만 있을 뿐.
6. 계속해서 은주에게 약 두 알을 건네는 무현을 통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
7. 영화 후반부에도 은주와 수미가 몸싸움하며 수미가 은주의 손등을 가위로 찌르지만, 후에 수미의 손등에 상처가 나 있다.
8. 마지막으로, ‘진짜’ 은주가 등장하자 ‘진짜’ 은주를 지나 은주에서 수미로 전환되는 직접적인 연출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점은 수미의 죄의식이다. 흔히, 민담에 등장하는 사악한 계모는 정서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지닌다(베텔하임). 착한 어머니와 사악한 계모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계모에게 죄의식 없이 분노를 투사한다. 즉, 주체들의 책임을 계모에게 양도하여, 혈연관계에 있는 구성원들을 구출하는 것이다.[3]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볼 수 있듯이, 수미는 수연을 사고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또는 은주가 수연의 죽음을 방관한 것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수연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수미는 두 자아를 만들어냈다. 은주와 수연의 자아를 만들어내, 은주는 수연을 ‘악질적으로’ 끊임없이 괴롭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항상 수연이 괴롭힘을 당할 때면, 수미가 나타나서 수연을 구한다. 이는 수연을 구하지 못했던 수미의 한이 아니었을까?
무현의 대사(반전)로 수미는 수연의 죽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은주는 더 괴상망측한 행동을 한다. 피가 흐르는 꾸러미를 복도에 질질 끌다가, 이내 골프채로 꾸러미를 패기 시작한다. 그리고 은주는 그 꾸러미를 장롱 속에 집어넣고, 뒤늦게 수미가 그 꾸러미를 발견한다. 수미는 그 꾸러미를 보고 수연이라고 확신하며, 꾸러미의 밧줄을 풀고자 한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수미는 ‘계모’인 은주를 응징한다. 필자는 이 장면을 ‘수미가 수연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이전까지 수연의 환상을 보던 수미는 수연의 죽음을 또다시 받아들이는 데에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은주를 내세워, 상상 속에서 수연을 죽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뒤늦게 수연을 발견하여 구하지 못한 트라우마는 반복되지만, 수미는 다시 수연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영화 속에서 첫 번째로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죄의식을 느낀 수미가 세 자아로, 그 본능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 여동생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수미는 그 시간에서 살아가며, 여동생을 구하고자 한 욕망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나타났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은 공포 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속에는 자아, 욕망, 죄의식에 관해 농밀하게 영화 속에 녹여냈다. 이러한 부분 덕분에 2000년대 초의 훌륭한 공포 영화로 지금까지도 평가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1] 황혜진.(2003).[영화(2)] ‘해체의 징후’를 드러낸 한국의 가족.공연과리뷰,42(),115-122.
[2] 채숙희, 이송이.(2004).『장화, 홍련』, 『크리미널 러버 Les Amants criminels』에 나타난 여성성과 위반.프랑스문화예술연구,12(),403-431.
[3] 임유경.(2010).공포와 죄의식의 이중주.문학과영상,11(3),741-778.
완벽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미뤘던 글...
샷 바이 샷으로 분석도 해보았는데, 굉장히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