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여느 때처럼 걷기를 시작하려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받기도 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니의 전화다.
“써니야...” 그 목소리엔 힘이 없다. 가슴이 다시 한번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대. 아버지한테 막 전화 왔어.”
숨이 막힌다.
“아버지 노망 나셨어? 갑자기 아프지도 않던 엄마가 왜 돌아가셨어?”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늘 위 달빛이 나를 비추는 듯, 눈이 따가울 만큼 환한 달빛 속에서 내 눈은 빛과 눈물로 가득 찼다.
“남편이랑 준우 깨워서 얼른 내려와. 큰오빠는 대전에서 올라오는 중이야.”
언니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나는 급하게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남편과 아들을 깨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얼른 준비하자.”
자다 깬 남편은 어리둥절해하며 화장실로 향했고, 급하게 일어난 아들은 이불 속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준우야, 뭐 하고 있어? 나갈 준비해야지!”
아들은 대답 대신 이불 속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는 할머니를 엄마처럼 여겼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할머니 집에서 헤어질 때마다 차 안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들은 잠시의 이별도 견디지 못하고 슬퍼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장례식장은 황망했다. 경찰의 사망 신고를 마친 후, 장례 준비를 시작했다.
엄마는 수의를 입고 누워 계셨다. 따뜻한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고, 얼굴엔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엄마의 마지막 전화번호가 세 번 찍혀 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날 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늘 같은 잔소리가 듣기 싫어 ‘회의 중입니다’라는 문자로 넘겼다. 그 전화가 마지막이었다.
그날 남편과 통화한 엄마의 목소리가 가족 톡방에 공유되었다.
“써니 재는 매일 뭐가 그리도 바쁘다니. 집에 가면 전화 한 번 하라고 전해라, 김서방. 준우는 별일 없지?”
코로나로 인해 조용했던 장례식장이었지만, 엄마의 장례식 날에는 경리가 잠시 풀려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우리 5남매는 손님을 맞이하며 바삐 움직였다.
조카들은 “고모 손님이 이렇게 많네. 술만 먹고 일은 안 하는지 알았던 고모가 대단한 사람이었어? 우리 할머니가 이 광경을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손님을 받느라 장례식장이 영업장이 되었다. 나는 돌아가신 엄마를 잘 보내드려야 하는 딸이다. 마음을 다잡고 살짝 들려있는 마음을 추스렸다.
장례를 마친 후, 우리는 엄마를 큰오빠 집 근처의 추모공원에 모시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김포 선산에 모셔야 했지만, 자주 방문할 수 있게 집 근처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함께 갈 곳도 정해두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오빠들은 매일 산소를 찾았다. 어릴 적 그렇게 속을 썩이던 오빠들이 이제는 엄마의 빈자리를 애타게 느끼는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가끔 “엄마, 나야. 밥은 드셨어?”라고 전화를 하면,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엄마는 황망하게 떠나셨지만, 남아 있는 우리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짐이 되지 않게 편안하게 떠나셨다.
엄마를 떠올리며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오래 건강히 살고 싶다. 아프지 않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엄마처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은 서로 연장선상에 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 나를 사랑하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성실히 사는 것이다. 매일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쌓아가는 삶. 그저 그렇게 나답게 살다 보면, 죽음이 찾아왔을 때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긍정과 열정으로 가득 찬 하루를 살아간다. 이 하루는 엄마가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