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니 방 안은 냉기로 가득했지만, 창밖을 보자마자 엘사가 'Let it Go'를 부르며 눈 덮인 얼음 궁전을 만드는 장면처럼 새하얀 마을로 변해 있다. 꽃 눈송이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은 설레임과 따뜻함을 주었다. 우리 형제들은 “첫눈이다!”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동네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 눈놀이를 즐겼다.
시골 풍경은 언제나 소박하고도 따뜻했다. 그중에서도 첫눈이 내리던 날은 특별했다. 첫눈이 내릴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얘기에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어제 경옥이가 절교하자고 쪽지를 보냈는데 다시 친구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빌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 동아리 선후배들이 선술집에 모여 앉았다. 창밖은 회색의 어둠이 무겁게 몰려와 눈이 올 듯 쓸쓸함이 느껴진다. 스피커에서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선술집 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짝사랑하는 선배가 바로 옆에 앉아 있다. 그 선배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술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술 좋아하고 잘 마시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배에게 고백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술을 끊는 건, 내가 좋아하는 주님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짝사랑만 하기로 했다.
술이 다들 어느 정도 취해 있는데 선배가 갑자기 일어서 창문으로 걸어간다. “첫눈이다!” 외치며 손가락으로 가르친 밖은 새하연 눈이 펑펑 내린다.
김건모의 목소리가 품고 있는 깊은 감성과 노래가사는 그 순간 묘하게 잘 어울렸다.
‘내리는 빗속에서
그대의 뒷모습 바라볼 때면
항상 내 마음은 안타까웠죠.
나를 떠나려 하나요.’
“우리 졸업하고 10년 후 첫눈이 오면 그날 여기 선술집에서 다들 보는 거다. 무조건 만사 제쳐놓고 그날 저녁 6시 모이기야.” 노래와 사람소리에 시끄러워 서로의 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와중에 한 선배가 맥주잔을 들어 올리며 10년 후 자기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고는 건배 제의를 한다.
“선배, 첫눈 오는 날이 지역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우리가 부산에 있을 수도 있고 서울에 있을 수도 있고 지연이는 유학가니까 미국에 있을 수도 있는데 첫눈이 같은 날 오지 않을 텐데요?” 내 얘기에 다들 ‘빵’ 터졌다.
“야! 써니 너 재치가 대단한데? 네 말이 맞다. 어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니? 그냥 오늘은 술이나 실컷 마시자”
노래는 김건모의 “핑계”로 바꿔 경쾌한 분위기로 술자리를 더 흥하게 했다.
“차장님, 죄송합니다. 저희 엔지니어가 실수가 있었나 봐요. 내일 오전에 뵙고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요즘 시스템 장애가 많다. 머리가 찌끈하고 스트레스에 아침마다 귀에 물이 찬 듯 멍멍하다. 외근 나가려는데 밖이 어둡더니 강한 바람이 분다. 눈이다. “첫눈이다!” 고객에게 혼나고 본 첫눈은 설레임도 없고 그냥 하늘 전체에 지저분한 흰 솜 가루가 떨어지는 듯 보인다. “차 막히겠네” “길이 질퍽하겠어” “나 미끄러운 구두 신고 왔는데 길 미끄러워서 집에 어떻게 가지?” 현실적인 감정들이 첫눈의 낭만을 가로막는다.
나 또한 지금 나가야 하는데 길은 질퍽하고 신발 다 젖을 것 같아 난감했다. 죽전역 갔다가 걸어서 20분 걸리는 업체를 가야 하는데 “이놈의 눈은 겨울만 되면 왜 오는 거야” 불평을 늘어놨다.
나이가 들고 일과 삶에 쫓기다 보니 첫눈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눈을 보면 소원을 빌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눈 오는 날의 불편만이 먼저 떠오른다. 첫눈이 내리는 날조차 특별한 날로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씁쓸하다.
첫눈에 대한 감정을 되찾고 싶다. 삶이 아무리 복잡하고 무거워도, 첫눈은 여전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작은 기적이다. 눈송이가 소리 없이 땅 위에 쌓이듯, 마음 한구석에 다시 설렘을 쌓이길 바란다.
눈 속에서 뛰놀던 어린 날의 나 자신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어본다.
여유를 갖고 나다움을 찾아가고 있는 요즘, 올해 첫눈에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