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되기 전에 알았었으면 좋았을 것들..
지구탐험을 꿈꿨던 탈북엄마 프랑스엄마로 살기.. 에세이
내가 왜 엄마가 되고 싶었는지,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자녀를 고려해 본 적이 있다. 나는 내 삶에 애착이 깊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다. 그리고 책임감이 강하다. 이런 나는 아이를 낳으면 내 삶의 일부를 희생해야 할 것 같았고,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도 출산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삶에 애착이 깊기 때문이었다. 실패도 많이 하고 힘든 시간도 겪었다. 지금 돌아보면, 가끔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태어나서 오늘을 살고, 배우고 깨닫고 성장하고, 이런 삶이 소중하다고 느낀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못 느꼈을 것이다.
엄마가 되고, 부모가 되면 우리는 자녀를 위해 내 삶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희생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밤늦게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가거나, 배낭 하나 메고 여행을 가는 등의 자유를 버려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의 뇌가 다시 프로그래밍된다는 프랑스의 신문 기사를 읽었다. 여성들이 출산을 하면 기억력 감퇴를 경험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 주변 엄마들은 남편이 했던 말이나 자기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자주 잊어버린다. 기사에 따르면 여성들이 출산을 하면 몸은 강력한 호르몬 변화를 겪게 되고, 뇌는 이를 인식하고 출산과 새 생명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기억력과 인지 능력을 재조정한다고 한다.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필요하지 않은 기억들을 삭제하고,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데 필요한 기억들을 강화한다고 한다. 나는 이 기사가 매우 공감이 간다.
프랑스에는 이런 말이 있다. "petit: petits sousi, grand: grands soucis" 이 말은 아이들이 어릴 땐 작은 근심 걱정을 부모에게 주고, 아이들이 커가면 갈수록 부모에게는 더 큰 걱정거리들을 준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무자식 상팔자'와 비슷한 말이다. 어르신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요즘 젊은 사람들이 윗세대처럼 애 낳고 밭 매는 근성이 없어서도 아니고 SNS의 등장으로 보여주기에 익숙하고 타인의 삶과 비교할 수단이 많아져서 부모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게 아닌 것 같다. 프랑스 사람들은 타인의 시각을 개의치 않고 본인의 인생과 삶을 진취적으로 즐긴다. 그런 프랑스 사람들도 육아나 자녀 양육, 교육 등은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산다. 그러니까 동양 사람들 특히 한국 엄마들만 자녀의 양육을 부담스러워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인생에서 자유와 자율적 의지를 기반으로 한 선택을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삼고 살아왔다. 북한에서 떠나올 때 수많은 고난과 난관이 내 삶에 펼쳐질 것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나는 가만히 앉아서 운명에 순응하기보다는 가다가 죽더라도 부딪혀보고, 북한과는 다른 세상을 마음껏 구경이나 하다가 죽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입국한 후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고 적극 돌아다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무슨 역마살이 낀 것처럼 외국을 참 많이 돌아다녔다. 중국, 몽골,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일본, 유럽까지 정말이지 이제 남은 북미 대륙과 남미대륙까지만 밟아보면 북에서 나올 때 목표했던 '지구탐험'의 대장정이 거의 완성된다. 그런데 내가 아이 둘을 낳고 양육하면서 미국 LA와 뉴욕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을 때 아이들 때문에 소원하던 미국 방문을 포기해야 할 때 정말이지 등짝에 들러붙은 것 같은 이 두 혹을 떼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성취하고 싶은 각자의 열망을 안고 살고 있다. 그 열망을 잃으면 남은 생을 살아갈 낙이 무엇일까? TV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누군가가 만들어 제공해 주는 화면에서 내가 잃어버린 열정을 투영해서 대리만족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면 삶의 권태가 지겹게 찾아올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내가 열렬히 흠모하던 자유는 사라져 버린다. 열정을 품고 탐구하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쓸모없는 허상처럼 느껴진다. 하루의 시작을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기저귀와 요강을 비우는 것으로 시작하고 아침을 먹이고 치우고 돌아앉아 아이들 먹일 점심을 준비하고 치우고, 또다시 뒤돌아 앉아 저녁을 짓고 치우고, 잠깐 남은 시간에는 나를 생각해 보며 내 친구들은 뭐 할까? SNS를 들여다보면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것 같고 나만 아이들에게 묶여 세상과 단절된 채 언제 끝날지 모를 긴긴 육아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할 생각을 하면 막연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한때는 대학을 다니고, 젊음을 즐기고, 꿈을 키웠다. 똑똑하고 열정적인 친구들과 '동학’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먹으며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고, 북한 출신으로서 '지구탐험’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나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잔소리와 안 된다는 말뿐이다. 같이 대학을 다니던 친구들이 하나둘 좋은 기업에 취직한 소식을 전해오면 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막은 적도 있다. 나는 엄마가 되어 '지구탐험’에 대한 나의 프로젝트는 아직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내 삶을 싫어하지 않는다. 엄마가 되어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사는 하루하루가 가슴 떨리는 미래에 대한 기대는 없을지 몰라도 소박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글을 써 내려가는 오늘은 소중하다.
남프랑스 늦가을 하늘은 온통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일 년의 강수량의 대부분을 가을과 겨울에 채우는 게남프랑스의 날씨다. 대지는 축축하고 차가운 물기를 가득 머금은 나무 가지들은 추위에 잔뜩 움츠러들고 있다. 창문 너머로 구름 뒤에 감춰져 있던 석양이 머리를 내민다. 내일은 해가 뜰까. 오 년의 긴 시간과 노력으로 공들여 키운 나의 두 아이들은 오늘 기분이 언짢은지 목청이 터져라 싸웠다. 갑자기 조용해져서 나가보니 동양과 서양을 조화롭게 닮은 남매와 서양 아빠가 버터를 녹이고 초콜릿을 넣고 밀가루를 섞어 쿠키를 만들어 오븐에 넣었다. 오븐의 유리문 사이로 익어가는 쿠키의 모습을 오구오구 모여 앉아 초롱초롱한 여섯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38선을 넘을 때 품었던 '지구탐험’의 원대한 꿈은 잠시 멈췄어도 이 작은 생명들을 품어서 키워낸 시간들이 아깝지 않고 무용하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쩌면 내 삶을 통째로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이들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내가 가장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무자녀를 선택하는 젊은이들에게 홀로 늙으면 말년이 외로울 거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과 어르신들이 살아온 세상이 다르듯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오늘과 많이 다를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그런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부모가 외롭지 않게 효도를 바라고 해달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양으로 우리 아이들도 자기들만의 힘들고 고된 세상을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들에게 말년의 나의 외로움을 덜어줄 것이라 기대하고 아이를 낳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있을까? 나는 아이들이 만들어 준 오늘이면 만족한다.
나는 아이들을 통해서 또 다른 세상을 봤다. 그거로 충분하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스스로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게 엄마가 뒤에서 늘 응원해 주는 것, 그게 내가 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