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관하여
컴퓨터 전원을 켠다. 락스크린은 '아... 하기 싫어' 커다란 자막이 있는 무한상사 박명수 차장. 모니터 앞의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아 맘에 쏙 든다. 다행히 더 하기 싫어지기보다는 작은 일탈처럼 느껴져 기분이 살짝 가벼워진다. 로그인 후 평범한 윈도우 바탕화면이 나오면, 제일 먼저 메일함을 연다. 퇴근과 출근 사이 발송되어 8시 반 수신함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메일들이 하나둘씩 도착해 쌓인다. 기다리는 동안엔 텀블러 2개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붙어 다니던 동료가 있지만, 이제는 전남친이 된 관계로 홀로 컵을 씻고 팬트리로 향한다. 내 퐁퐁과 수세미를 함께 쓰던 그는 보아하니 큰 사이즈의 종이컵을 대량 주문한 것 같다. 그 답다는 생각을 잠깐 한다. 자리로 돌아와 앉아 뜨거운 커피가 입안을 지나 가슴 가까이 간 것이 느껴지면, 이제 마음을 직장인모드로 바꿔 끼운다.
업무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나에게 몇 건의 물량이 배정되었는지 확인한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비행기 안에 아직 실려있거나 갓 내리는 중인 물건들은, 지리적으로는 한국에 있으나 관세법으로 보면 국경 밖인 '보세구역'에 쌓여 통관이라는 절차를 기다린다. 그 통관에 필요한 것들을 안내하고 구비해 관세사로 넘기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통관이 끝났다면 물품은 국경을 넘어, 전국의 각 배송지로 출발하게 된다.
우리는 대부분 각자의 일을 하기 때문에, 서로 대화하는 일이 많지 않다. 그래도 물량이 유난히 많은 날이나, 10 분째 같은 말만 하는 화주를 만났을 때에는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인다. '아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 나 진상만남', ' 점심뭐드실' 등등. 가장 중대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러나 여유는 길게 허락되지 않는다. 다시 대화를 멈추고,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관세사에 수입신고 요청을 한다. 성과는 오직 숫자로 나오기에 우리는 최대한 빨리, 많이 통관을 시킨다.
사무실은 늘 타자소리와 전화 말소리로 가득하다. 메일은 최대한 간결하고 명확하게 작성한 후 발송 단축기 ALT + S를 누른다. 마우스를 끌어 비행기모양 발송버튼을 누르고 있다간 정시퇴근과는 멀어진다. 화려한 단축기 스킬을 구사하며 키보드를 두들긴다. 우리 부서는 수입통관부면서 콜링팀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름만큼 전화업무도 많다. 안녕하세요 000의 누구입니다, 로 시작해서 갖가지 정보를 안내하고 수집한다. 끊임이 없다. 대부분 친절하고 입발린 말도 곧잘 하는 우리지만, 상황에 따라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들이 생긴다. '저희가 상자를 열어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세금은 내셔야죠!!', '세관 규정입니다!!'. 내 일이 되면 싫지만 남들의 그런 통화는 늘 흥미진진하다. 그가 수화기를 쾅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면 메신저를 켠다' 뭔데?ᄏᄏᄏ'. 우리의 메신저창은 대체로 푸념과 뒷담화로 가득하다.
처리하면 다시 채워지는 업무의 반복 안에서 우리는 빠르고 정확하게 일해야 한다.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해내라니. 입사초반의 나는 다채롭게 실수했고, 퇴근 후나 주말이 되어도 불안함에 잠들지 못했다. 3 년쯤 지나니 나는 제법 노련해졌다. 여기서 노련함이란 일에 대한 능숙함 30, 실수에 대한 관대해짐이 70 정도 되겠다. 고객들도 그렇게 되면 좋으련만. 도는 속도는 회사가 정하는 쳇바퀴 안에서 나와 내 동료들은 늘 다른 일, 기계적이지 않고 화주에 무시당하지도 않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를 할 수 있길 꿈꾼다. 그래도 막상 이직은 쉽지 않다. 당장의 카드값이 제일 큰 이유지만, '애증' 중 '애'가 아주 조금은 더 커서 그런 게 아닐까?
우리 부서 누구한테 물어도 사람과 분위기가 좋다는 것이 그나마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떠나지 못한다고. 소위 말하는 꼰대와 요즘 미디어에서 단적으로만 다뤄지는 MZ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아니 누가 회사에 장난감 바퀴벌레를 가져온담? 나의 사수 K계장은 해외직구로 각종 곤충, 파충류 형태의 장난감을 사들이는데 그 목표는 사무실 직원들, 그리고 자그마치 이사님을 놀리기 위해서다. 이런 장난이 용인되는 분위기. 어쩌면 다들 비슷한 부위의 나사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일이 바빠 정치질이며 편 가르기 할 시간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겠지만.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부지런히 불평하면서도, 꾸역꾸역 남아있는 미결 건들을 처리하기 위해 수화기를 든다. 아 이번엔 막내 B사원의 목소리가 또 커졌다. 부쩍 자신감이 붙은 모습이다. 하던 전화는 빨리 끊고 그의 전화내용에 귀를 기울인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 주변의 우리들은 또 킥킥댄다.
20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