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이후
지나고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한 사람의 얼굴이 어른거리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혐오와도 가까웠다.
나는 기질적으로 생각이 많았고 걱정이 많았고 항상 가슴이 울렁거리고 불안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막막했다.
아빠는 저녁에 반주를 곁들이는 걸 좋아했고, 제 나이에 금지된 거라면 뭐든 하고싶어하는 딸은 성인이 되자 당연하다는 듯이 술을 좋아했다.
잠들기 전에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몇년전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잠이 들기 위해 뒤척거리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마시던 술은 어느덧 집에 오자마자 안주 없이 깡소주를 한병, 한병반씩 들이키고 기절하듯 잠드는 나날로까지 이어졌다.
끊게 된 계기가 나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다. 나는 내가 심각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하니 잠이 잘 왔을 뿐이다.
약을 먹고도 잠이 들지 못하자 타미플루 나이트를 곁들여 매일 먹는 나날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술보다 낫겠지. 나는 생각한다. 결국에 내가 원했던 건 잠드는 것 뿐이었던 것이다.
어느덧 술을 먹지 않은지 4달 정도가 지났고, 거의 매일 마시던 술 대신 나는 급하게 조그마한 알약들을 입안에 털어넣는다. 이걸 안먹으면 큰일날 사람처럼.
내가 먹는건 뉴프람정, 자니팜정, 로라반정, 유니작정. 항불안, 항우울, 불면에 작용하는 아주 작은 크기의 알약들.
나는 내 우울 없이는 내가 아니고 내 우울에서 오는 힘을 사랑하지만 없으니까 살 것 같다.
드디어 남들이 원하는 사람을 연기해낼 수 있는 힘이 생겼고 더이상 취해 잠들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단돈 몇천원에 현실을 잊으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라는 문구를 본 순간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그때의 내가 너무 불쌍하고 아프게 느껴지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변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나는 똑같이 아프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느껴지는게 아무것도 없다.
엄마는 내가 정신과에 다니는 걸 모른다.
약을 털어넣는 날 보고 나는 널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키웠는데 왜 그렇게 아프냐고 속상해하셨다.
나도 속상했지만 안 먹을 수가 없었다.
약을 먹으니 나는 엄마랑 한시간 누워서 이야기하는 애교많은 딸이 되었는걸.
아빠가 사소한 과거 일을 잘 기억하는 나에게 말했다.
아빠가 너에게 한 말 중에 서운하게 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냐고.
정신과 약을 먹은 나는 말했다.
있지만 나도 말을 예쁘게 하는 편은 아니잖아. 나도 아빠에게 못된 말 많이 했으니 우리 퉁치자.
약에 평생 의존해서 살아도 괜찮을까. 다음에 가면 수면제도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