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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영수 Sep 08. 2024

24년 9월 8일의 일기

영화감독인 지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의 영화가 서울의 모 영화제 단편초청작으로 뽑혔다는 것이다. 나는 그 영화의 제작에 도움을 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참석이 망설여지긴 했으나 전부터 영화에 대한 깊은 사랑을 드러내는 그 사람이 만든 영화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덥석, 참여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홍대의 작은 극장으로 갔다. 다섯 개의 단편영화가 한 섹션을 이루어 약 70여분간 이어지는 형식이었다. 지인의 영화보다 눈에 띄는 단편이 있었다.(지인의 영화도 좋았다.) 마지막 영화, 제목과 영화 내용이 썩 와닿지 않는, 그리고 그 감독의 GV에서 질문에 대답하는 행태도 볼 만했다. 제목은 자신이 이제 영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서 그렇게 지었고 영화 내용은 만들다보니 많이 바뀐 것이다, 영화는 그만 찍을 것이다, 취업을 해서 다다음 주에 출근을 앞두고 있다 등등. 나는 그저 불편하기만 했다. 저 영화 한편이 나머지 네편의 영화를 흐리고 있는 중이라 여겼다. 이 생각은 GV를 보기 전,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계속 했다. 그 영화가 눈에 띄인 이유는 간단히도 내가 사유를 통해 어떤 것을 생산해낼 양분을 제공했다는 것, 그것이 비판도 아닌 비난에 그쳐 씁쓸한 맛을 낼지라도 뭔가를 만들어 냈다는 것, 나는 거기서 기쁨을 느껴버린 것이다.


 그 영화는 농인 고등학생이 춤 경연에 나가기 위한 준비, 농인 어머니를 둔 친구와의 일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엔딩씬의 두 고등학생의 춤에 모든 힘을 주기 위해 앞의 서사를 이용한 것으로 나는 혼자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서 그 장면은 빈터베르그 감독의 어나더라운드 라는 영화의 엔딩씬을 어설프게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장애라는 것을 이용했다,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하고 피상적이기만 하다, 저 감독은 장애와 중산층의 재정난을 같은 선상에 두는 삶의 풋내기다, 또 농아가 춤을 추며 겪는 고충은 동작의 어설픔보다 박자를 맞추기 어려운 것으로 포커스를 맞췄어야지라며 혼자서 영화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 속의 대담에서 그 감독보다 나의 지적인 우위를 점유하기에 유용했다. 나는 그 사람을 재단하고 깎아내리며 희열을 느꼈다. 


 나는 그 정도로 옹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내가 현재 구상 중인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상상 속에서 난 GV에 참석해 마이크를 잡고 객석에서도 내가 질문을 했다. 난 질문에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그게 내가 지금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이유다. 나는 내 소설 속의 인물을 죽일 권리가 있는가? 나는 내 소설 속의 인물에게 칼을 쥐어주고, 건물에서 뛰어내리게 하고, 목을 메달게 할 권리가 있느냔 말이다. 그 등장인물이 어느날 꿈에 나와서 대체 내가 왜 고작 작가 당신이 원하던 결말로 가기 위해서 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인물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조차도 설득되지 않으면서, 나 스스로도 답을 모르고 일단 농아가 춤을 추게 하고 그 친구는 좀 가난한 것으로 하자, 그러면 나중에 춤 출 때 그림 좋잖아 라고 생각했을 감독에게 뻗었던 손가락이 낯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 수 있을까. 일단 집으로 돌아간다면 오늘의 일을 기록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해보자며 나를 우선적으로 위로했다. 그렇게 GV가 끝나고 요의를 느껴 화장실로 이동했다. 우연한 만남으로 마지막 단편영화, 농아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그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내 옆 소변기에 있었다. 영화제 카탈로그를 소변기 위에 둔 채로 소변을 누고 있었다. 나는 눈 바깥 쪽으로 그 형상을 흘겼다. 그 감독은 소변을 마치고 카탈로그를 소변기 위에 그대로 둔 채로 손을 씻으러 갔다. 나는 그것이 다시 또 못마땅했다. 이제 영화제가 끝나고 GV까지 끝났다고 해도 쓰레기를 화장실에, 그것도 쓰레기통도 아니고 소변기 위에 아무렇게 두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5분 전의 나에게도 무안하게 솟구쳤다. 하지만 그 감독은 손을 씻고 다시 카탈로그를 챙겨 화장실을 나갔다. 나는 이렇게도 한심한 사람인 것이다. 집으로 가야겠다. 부끄러운 발걸음을 무책임하게 5712 버스에 맡기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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