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성은 오늘도 340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모든 게 무의미해 보였다. 어제와 똑같은 길, 똑같은 풍경. 유리창 너머로 스쳐가는 빌딩들과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흐릿해 보였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채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내 목소리를 들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네 알겠습니다."와 "응" 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억해 봐도 "네"와 "응"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밋밋한 풍경을 지나서 회사에 출근을 한다. 몇몇 직원들이 출근해 있다. 딱히 인사는 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소음을 만들고 싶지 않다. 다들 무언가 하며 바빠 보이기에. 이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그 이후에 출근하는 직원들에게도 굳이 인사를 하지는 않는다.
물론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게 좋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인사를 안 했는데 오늘 갑자기 인사를 하는 것이 어색하다. 그냥 집중하는 것처럼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사실 뭔가를 하고 있지는 않다. 시답잖은 홈페이지와 뉴스를 보면서 시간을 버려내고 있다.
"태성아 일루 와 봐!"
올려둔 보고서를 보고 과장님이 부른다.
"아니 넌 일을 누구한테 배웠길래 보고서가 이러냐?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잖아!"
고개를 숙이고 조그맣게 이야기를 한다. "수정하겠습니다."
한때는 열정도, 아이디어도 넘쳐났던 자신이었지만, 그 마음을 꺼내놓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냉정한 반응이 돌아왔었다. 그들은 말하곤 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매일 같이 마주하는 그 말에, 태성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침묵의 습관이었다. 이 습관은 관성이 되어서 어느새 이태성 자신이 되어버렸다.
회사에서의 8시간 침묵을 지키고 집으로 돌아오면 상황은 더 답답했다. 본인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내는 태성의 이야기에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혼 때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재밌던 일들, 친구들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본인을 무척 사랑하는 아내에게 회사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는 점점 비교의 대상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그 친구는 어디에 집을 샀는데?"
"왜 그 동료는 벌써 승진을 하는데? 당신은 왜 승진을 못하는데?"
모든 것을 비교로 시작해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그녀의 말에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안방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 그녀를 피해 거실로 나와서 티비를 켠다. 입을 닫은 채, 맥주를 한 캔 마신다.
태성에게 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퇴근하고 나서 맥주 한 캔을 입에 넣는 것이다.
티비에서는 야구경기가 한창이다. 야구를 보다 보니 어릴 적 자신이 떠올랐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야구를 하던 아이. 집에 돌아와서는 안타를 쳤다고 엄마에게 자랑하던 유쾌하고 웃음이 많았던 아이. 모든 순간들이 이야기의 소재였고, 모든 순간들이 즐거움이 되었던 시절의 이태성.
하지만 지금의 그는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남에게 듣기 좋은 말들만 조용히 던져주며, 그렇게 자신을 지워가는 중이었다.
태성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사회적 벙어리'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