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디(GD)가 컴백했다. 오랜만에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다. 7년의 공백을 깨고 30대 중반이 되어 컴백한 지디는 인터뷰하는 내내 편안해 보였다.
지디는 6살부터 지금까지 권지용이 아닌 지디라는 캐릭터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나 부러워할 명성과 부를 누려왔다. 내는 앨범마다 히트의 연속이었고 지디라는 이름자체가 브랜드가 되어버렸다.
지디의 소장품 전시회 모습
그의 일상은 국내외의 무대에 서거나 그 외에는 작업실에서 노래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계속 방전된 생활을 하였고 그 안에 생긴 공허함을 돌볼 새도 없이 살아왔다고 한다. 그렇다고 주변 누구에게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기에 유일한 위로는 글을 쓰고 그것을 노래로 만드는 방법뿐이었다고 한다.
권지용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온 날이 4~5년밖에 되지 않아 군대 가기 전에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은 권지용이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지디는 그 앨범을 내면서도 이 노래를 다른 사람이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자신 안에 진짜 이야기를 너무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것을 들켜버리는 것 같아 숨기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 안에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어렵게 꺼내 놓은 이야기들이 더 큰 공감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도 한다.
브런치 안에 이야기들중 자신의 약함에 대한것들이 꽤 많다. 그리고 그런 글들에 공감도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누구나 약함이 있지만 , 없는 척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의 약함에 대한 글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때가 많다. 약함은 자동차 브레이크 같다. 앞만 보고 직진하는 삶에 속도를 줄여주고 또 잠깐 멈춰서 뒤도 돌아보게 해 준다. 그것이 약함의 유익이다.
지디의 이번 컴백은 컴백을 위한 컴백이 아니라 컴백하고 싶어서 하는 컴백이라고 한다. 싸우고 맞서서 이기려고 했던 것이 과거의 자신이라면 이제는 옥죄어 오는 상황들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냥 져도 아무렇지 않은 현재의 자신으로 컴백을 하겠다고 한다.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해요. 져요 그냥.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그 길에서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디는 계속되는 성공 속에서 누구 보아도 행복하여야 할 상황이지만 당사자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보아도 부러운 상황에서 누구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풍요한 상태에서 오는 결핍.
그 결핍은 밑 빠진 독이다. 스스로 아무리 채우려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밑 빠진 독의 실체를 알게 되면 채우려는 노력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물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독의 밑부터 고쳐야 한다. 내 안 깊숙이 있는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위로하고 싸매어주어야 한다.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했어 가 아니라 그래 이 정도면 잘 살아낸 거야로 마음을 바꿔야 한다.
가끔 퇴근길 마을버스 안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 왜 이렇게 밖에 못 살고 있지? 왜 그때 더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
그런 생각이 든 상태로 마을버스에서 내려서 걷다 보면 나도 처량맞고 내 앞에 엎드려있는 그림자조차도 초라해 보이곤 한다. 힘없는 걸음으로 편의점 앞을 지나가다 보면 그 앞에 파라솔 아래서 맥주 한 캔 씩 따서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이런 울적한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가 없다니... 인생 잘 못 살았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한없이 작아져서 바람이라도 휙 불면 맥없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먼지가 되어.
그런 마음을 달래주는 건 기타이다. 30년째 늘 비슷한 실력이지만 그래도 그 녀석을 튕기다 보면 술 한잔 따라주는 것 같은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심취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한량 베짱이가 되고 아내는 일개미처럼 고무장갑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런 위험을 감지하면 슬그머니 기타를 원 위치하고 조용히 빨래를 갠다.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그래야 한다.
그렇게 밥 한 끼 얻어먹으면 행복해진다. 아마 배가 고파서 오는 허무감이었나 보다.아주 얕은 허무감이다.
<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서 애벌레 탑이 나오는데 , 줄무늬애벌레는 그 꼭대기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오르지만 그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오르려는 애벌레들만 있을 뿐. 그 꼭대기에 오른 애벌레들만이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꼭대기에 오르려는 다른 애벌레들에게 그곳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누구도 그 소리를 믿지 않고 그저 꼭대기를 오르기에 매진한다.
꽃들에게 희망을 삽화
줄무늬 애벌레는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나비가 되어 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엔 비행이 아닌 추락만 존재했다. 빈것만 있는 높은곳에서 내려온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 안에 있는 재료로 고치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결국 나비가 된다.
나는 어린 시절 이 책에 제목이 이상했다. 왜 <꽃들에게 희망을>이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이야기니까 <애벌레들에게 희망을> 아닌가?
이 책은 단순히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한 고군분투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책에 마지막엔 이렇게 적혀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나비가 되면서부터가 진짜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비가 된 후에 꽃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옮기라는 것이다. 나비로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피운 꽃들로 아름답게 세상을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유퀴즈에 나온 지디(GD)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꽃들에게 희망을>의 줄무늬 애벌레가 생각났다. 꼭대기에 오른 줄무늬 애벌레. 우리는 그를 부러워한다. 하루라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한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잘 안다. 내면 깊숙이서 올라오는 소리를 들으면 알게 된다.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고 내 속의 것에 귀 기울여봐야 한다. 그러면 자신 안에 희망을 꽃피울 재료를 찾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도 나비가 될 수 있다. 그렇게 꽃들에게 희망이 되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