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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이씨 Dec 20. 2023

탈모

퇴사 D-17

백수 생활 시작도 못했는데 빚부터 지게 생겼다.


무려 124만 8천 원.


머리가 본격적으로 얇아지기 시작한 건 이직을 했던 2년 전쯤부터였다.


대기업에서 IT 사무직 생활을 하다가 개발자 꿈을 키워보겠다고 판교로 이직을 했는데 썩 적성에 맞지 않았나 보다.


거기에 재택근무까지 하게 되니 운동량은 0으로 수렴.


처음엔 재택근무라고 해서 웬 떡이냐 했는데 하루 이틀 경험해 보니 떡이 아니라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출근을 해볼까도 했지만 내 보잘것없는 실력을 동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들켰던 것 같기도)


그렇게 본의 아니게 칩거 아닌 칩거를 하다 보니 체중도 눈에 띄게 불었고 피부도, 머리도 점점 망가져갔다.


그래도 사직서를 내고 장기간 리프레시 휴가를 보내면서 많이 회복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느닷없던 남편이 하는 말.


"머리가 더 빠진 것 같은데..?"


그 자리에서 바로 동네 탈모 병원 알아보고 오늘 가서 3개월 12회로 결제하고 나왔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막상 가서 결제를 하려고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던 금액.


먼저 다른 병원을 다녀봤던 남편에게 저렴한 걸 하는 게 낫겠냐며 묻는데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비싼 거로 해. 2년 동안 건강 잃고 돈 벌었으니 이젠 써야지"


어제 가만히 있던 나에게 어퍼컷을 날리더니 오늘은 나으라고 보약 한 사발을 들이미는 남편.


남편이 지원해 준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퇴사 후 일할 생각만 하고, 나를 돌볼 생각은 안 했네'


남편의 도발 아닌 도발 덕분에 일이 아닌 나를 위한 시간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하루다.



< 그림 설명 > 어딘가에 박제되어 있을 나의 정수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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