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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너는 나를 키운다

오늘 생각 24

by 은진

서랍에 넣어두었던 2023년 9월 어느 날의 기록을 들여다보았다. 지금과 상황이 비슷해서인지 그때의 상황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필 시험기간이라 혹여나 아이가 옮을까 동동거린 탓에 심신이 지쳐있는 지금, 오늘은 허리마저 심상치가 않다.


지금은 독감, 그때는 코로나.

여전히 우리는 전염병과의 싸움을 하고 있구나.

아이고...




우리 집에도 첫 번째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

혼돈의 시기를 그야말로 방구석에서 버티며 잘 견뎌왔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남편은 역시나 피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2주 격리의 심각했던 시기를 피한 것이 어딘가 하면 나름 선방이다.


코로나에 걸린 남편은 5일의 격리 권고 기간이 지나자마자 다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5일 만에 출근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머리가 멍하네."

좀처럼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코로나는 다르긴 다른가보다. 사는 게 뭔지 꾸역꾸역 출근하는 뒷모습이 짠했다.


가만있어 보자... 오늘이 벌써 8일 차구나.


5일 차에는 아이가 목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한차례 심장을 떨궜다. 부랴부랴 검사를 받고 다행히 일반 목감기로 진단이 내려졌지만 연휴를 앞두고 혹시나 증상이 악화될세라 조심 또 조심하며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마스크 착용에 소독에, 남편이 도와주던 일들까지 혼자서 하려니 몸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아픈 두 남자들 케어에 정신적으로도 피로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도대체 왜 열체크조차 매번 시켜야지만 하는가 말이다.



무겁디 무거운 몸을 겨우 움직여 저녁을 준비하려고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인 어묵을 발견하고 피망을 함께 꺼내며, 어묵볶음이랑 아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도 해야지 생각했다.


냉장고에서 쌀을 꺼내어 씻기 시작하는데,
이게 뭐야?
물에 동동 뜬 작은 이물질이 보였다.

정체가 불분명한 그것을 집어 버리며 갈등이 시작되었다.

'다 버릴까? 아니야... 아깝잖아.

그래도... 혹시 탈이 나면 어쩌지?'

손과 마음이 따로따로 움직인다.
여러 번 씻고 또 씻어도 찝찝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결국 두 쏟아 버리고 말았다.


겨우 힘내서 움직였는데 이게 뭐람.

왈칵 눈물이 차랐다.

혼자 있었다면 아마 지랄 맞은 성질머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었을 거다.


밥 하다가 우는 엄마라니, 혹시 이거 공포물인가!?

코로나에 놀라고 목감기에 고생하는 아이에게 그런 꼴마저 보여줄 수는 없었다.


욱하는 마음과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틀어막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의욕이 싹 사라져 밥 짓기를 포기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파스타집에 배달을 시켜야 하나 고민한다. 주방은 주방대로 어질러지고 저녁은 배달시키고? 밥도 하기 싫고 배달도 시키기 싫고 내 마음 나도 몰라 갈팡질팡하다 묻는다.


"리소토(나름 쌀이니) 먹을래? 아냐 아냐 그럼 어묵은 어떡해."


"반찬만 해두면 되지."

(천재 아닌가...)


"아, 그럴까? 그럼 너는 리소토 먹고 엄마는 파스타 먹을까?"




주문을 해두고 아이가 말한 대로 어묵을 볶으며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한숨을 흘린다.


'일주일이 딱 한계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혼잣말을 하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너무 힘들어서 그래, 일을 너무 많이 했어. 얼른 쉬어."

세상에! 이렇게 다정할 수가 있는 건가!

다정한 뽀로로와 친구들을 보고 자라서인가? 아니지, 내가 잘 키운 건가!?


대단치도 않은 이 몇 마디 안에 애정과 배려와 걱정이 담긴 것을 알기에, 소리 지르고 싶고 울고 싶어 술렁이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화를 되찾았다. 신기할 만큼 잔잔하게.




너로 인해 나는 조금씩 둥글어지고 있다.

뾰족뾰족 솟은 가시가 행여나 너를 찌를까 두려워 살살 깎아내면서...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너를 키우는 건지, 네가 나를 키우는 건지 알쏭달쏭하다는 거야.

그리고 고맙다고.



오늘따라 아이랑 먹는 파스타가 참 맛있다.


여기 맛집이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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