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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22. 2024

작별하지 않는다

<2부 밤>의 1편 작별하지 않는다(190~199쪽)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뜻은
그들의 작업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미완성임을 암시하는 것!     
『작별하지 않는다』 2부(밤)에서 작가는, 지극한 사랑은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까? 작가는 꿈인 듯 생시인 듯, 아니면 이 세상 속이 아닌 유령의 숲으로 우리를 이끈다. 대학 시절 그의 시를 감상한 교수들이 작가에게 무당(끼)가 있다고 했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이런 시평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또 실제 그의 소설 속에는 그가 지었던 시문(詩文)이 구절구절 박혀 있다. 그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먼저 읽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다면 그의 소설이 시적 산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벨문학상위원회의 심사위원들이 그의 소설을 얼마나 꼼꼼히 읽고 깊이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노벨문학상위원회 위원장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문에서 "그녀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라고 했다. 매우 적확한 수상 이유라 하겠다.     

나는 특히 아래 옮긴 소설 2부(밤)의 1편 「작별하지 않는다」(190~199쪽)에서 작가가 의도한 ‘작별’의 의미를 찾으려 이 부분을 몇 번이고 읽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릴 만하다. 나 역시 읽는 데 몹시 애를 먹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이야기 전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야 말겠다는 욕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적 산문’이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은 이야기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야기 조각들을 조합해 나간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작품 속에 뿌려진 이야기 하나하나가 거의 독립적으로 빛나는 구성이다. 그래서 문단 하나하나를 한 편의 시편으로 읽어내야 하는 구절이 많다. 또는 어느 부분은 부조리극으로 보아야 하는 대목도 있다.

그래서 스스로 위로를 하게 된다. 문학적 소화력이 모자란 나에게 이 소설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고.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불꽃들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아무것도 더 묻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확고해서, 지금 내가 짐작하는 그녀의 생각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선은 언제나처럼 이곳에서 나무 작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고, 서울에서 내가 받은 문자와 이 섬에서 겪은 모든 것이 망자의 환상이었을 뿐이라고.     


그러잖아도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는데.     

벽면에 기대선 나무들을 가리키며 인선이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솔직하게 나는 대답했다.     

나는 사람의 키 정도를 생각했는데.


처음엔 그렇게도 해봤어.  

   

스케일을 바꾼 이유를 이어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말을 아꼈다. 작업대 상판을 짚고 바닥으로 내려서며 가볍게 물었다.  

   

차 마실까?     


성큼성큼 작업장을 가로질러 숲 쪽으로 난 앞문을 향해 걸어가는 인선의 뒷모습을 나는 바라보았다.     


정전되면 안채에서 고체연료를 쓰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아마한텐 해로우니까 여기서 마시고 가자.     


나에게서 멀어진 만큼 인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가 앞문을 열자 한결 실내가 밝아졌다. 그 빛에 의지해 문 옆 조그만 냉장고의 불 꺼진 냉동실을 뒤적이며 인선은 모르는 노래의 한 소절을 허밍으로 불렀다. 시고 심심한 산열매를 또 끓이려는 걸까.     


제목이 뭐야?     


밀폐 용기에 담긴 것을 나무 숟가락으로 덜어 주전자에 넣다 말고 인선이 물었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열린 양쪽 문으로 바람길이 통해, 난로의 바람구멍 안쪽으로 세차게 솟구쳐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검붉게 달아오른 난로 위에 인선이 주전자를 올렸다.


주전자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삽시간에 증기가 되며 모래알 쓸리는 소리를 냈다.     


말을 꺼내지도,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은 채 우리는 앉아 있었다. 주전자 밑면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에야 인선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아직 주전자의 부리에서 김이 솟지 않았다. 비등점을 넘어서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흰 실타래 같은 증기가 주전자 부리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맞물렸던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반쯤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앞문 너머로 보이는 숲의 아래쪽이 거의 검어졌다. 눈에 덮여 둥글고 부슬부슬한 윤곽선을 새로 얻은 나무 밑동들이 박명 속에 희미하게 빛났다.    


저 어둠을 뚫고 갈 수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간밤과 달리 이제 나에겐 손전등이 있다. 하지만 그사이 눈이 더 쌓였다. 무사히 버스 정류장까지 간다 해도 P읍으로 나가는 버스가 다니지 않을 거다. 인선이 있는 병원에 연락하려면 불 켜진 집들의 문을 두드려 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청해야 할 거다. 봉합한 신경이 끊어진 걸까, 나는 생각했다. 어깨를 절개한다던 수술을 받은 걸까. 마취가 잘못되었을까. 다른 의료사고가 있었나.     


내 답을 듣기를 체념한 듯 인선이 오른손에 목장갑을 끼었다. 성난 듯 달그락거리는 주전자의 손잡이를 집어 들고, 작업대에 나란히 놓은 두 개의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걱정했던 거 기억나?   

  

먼저 부은 잔을 나에게 내밀며 인선이 물었다. 산오디가 아니었다. 연둣빛이 도는 맑은 차에서 풀냄새가 났다.     

제주에도 충분히 눈이 오느냐고 네가 걱정했잖아.   

  

자신의 잔을 들고 작업대에 기대서며 인선이 활짝 웃었다. 그 미소가 가시지 않은 입술이 찻잔에 닿는 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렇게 뜨거운 것을 혼이 마실 수 있나.     


무슨 차야?

나는 물었다.     

조릿대 잎.     


나도 잔에 입술을 댔다. 차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 순간 내가 얼마나 그걸 기다려왔는지 깨달았다. 혀끝을 델 만큼 뜨거운 걸 마시는 것. 그 열기가 식도와 위를 적시는 것.    

 

어렸을 땐 온 식구가 물 대신 이걸 마셨어.     

인선이 말했다.


산에서 조릿대 끊어오는 심부름도 많이 했어, 신경쇠약에 좋다고 해서.     


잔에서 입술을 뗀 인선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뱃속에도 이 차가 퍼지고 있을까.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숲을 향해 나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바람이 안 불어서 그래. 인선이 달래듯 말했다.

눈이 날리지 않으니까 무게를 못 이겨서.   

  

청회색 박명이 나무들의 우듬지를 밝히고 있었다. 희미한 빛을 품은 함박눈이 계속해서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차를 더 마셨다. 위가 뜨겁게 채워질수록 수그렸던 어깨가 펴지고 허리가 곧아졌다. 반쯤 차가 남은 잔을 들고 자세를 바로 하며 나는 말했다.    

 

…… 나도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인선이 어깨를 앞으로 기울였다.

내 말을 집중해 들으려는 것이다.    

 

어떻게 지낼 수 있었어?

인선의 몸이 좀 더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곳에서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그녀가 되물었다.

이곳이 어떤데?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앞서 내가 했던 말을 조용히 반박하듯 인선이 말했다.


혼자가 아닌데, 나는.     


고요한 사랑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어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마가 있잖아.     


그 빛이 꺼지는 듯하다, 잔불처럼 쓸쓸히 되살아났다.

아미는 죽었어, 여러 달 전에, 아마는 사흘을 물만 먹었어. 그렇게 좋아하던 오디도 안 먹었어.     


인선이 잠시 말을 끊었다.     


아침까지 분명히 괜찮았는데, 저녁에 안채로 돌아가서 보니 이상하게 아미 눈이 흐렸어. 그길로 병원에 데려갔는데 하루를 못 넘겼어.   

  

숲에서 흘러들어오는 박명이 빠르게 검어지고 있었다. 어두워질수록 난로의 바람구멍들이 선명히 붉어졌다.


왜 나한테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 걸까? 아프다 해도 나는 천적이 아닌데.     


두 개의 그 붉은 구멍을 응시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눈동자 같은 그것들을 지켜보면 뜨거운 말이 쇳물같이 흘러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우린 대화를 나눴어, 너도 봤지.

작업대에서 내려서며 인선이 물었다.    

 

사실은 어떤 말도 나눠진 적 없었었던 걸까? 새는 새였고, 나는 인간이었을 뿐일까?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다시 목장갑을 끼고 난로의 달궈진 문을 열었다. 부지깽이로 나무토막을 뒤집자 불티가 튀었다. 불꽃의 열기가 내 얼굴까지 끼쳐왔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인선의 목소리가 그 열기 사이로 번졌다.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어떻게 위로할지 알 수 없어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어디에 묻었어?


선홍빛으로 달궈진 난로의 문을 닫으면서 인선이 대답했다.     


마당에.

마당 어디에?

나무 아래.     


눈을 들어 창이 없는 마당 쪽 벽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네가 사람 같다고 했던 나무 있잖아.     


눈 속 무덤을 내 손으로 파헤쳤을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삭은 뼈들을 내가 삽으로 부수고 손갈퀴로 흐트러뜨렸는지도 모른다.     


인선이 손을 내밀었을 때, 악수를 청하는 거라고 나는 잠시 착각했다. 그러나 빈 잔을 달라는 거였다.


나에게서 받아든 잔과 자신이 마시던 잔을 겹쳐 작업대에 내려놓으며 그녀는 말했다.     


이렇게 두고 가자.     


오늘 우리 몸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에야 나는 알았다. 오랜만에 만나면 언제나 서로 어깨를 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어떻게 지냈어, 인사를 나누는 동안엔 손을 잡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두고 있었나. 몸이 닿는 순간 상대의 죽음에 전염될 것처럼.   

  

콩죽 먹을래?     


앞문으로 걸어간 인선이 푸르스름한 바깥을 등지고 물었다.


너 그거 좋아하잖아.     


인선이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닫자,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사위가 어두워졌다.   

   

미리 콩을 불려놔야 끓일 수 있는 거 아니야?


몸을 돌려 잠금쇠를 거는 그녀를 향해 나는 물었다.  

   

불려서 얼려놓은 게 있어. 정전이라 믹서기를 못 쓰니까 콩이 씹힐 텐데, 그것도 맛있어.   

   

인선이 성큼성큼 앞장서는 대로 나는 뒷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발이 디딘 곳으로만 걸으니 신기하게도 어떤 나무에도 부딪히지 않았고 피를 밟지도 않았다. 그녀를 따라 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난로를 돌아보았다. 달궈진 옆면에 뚫린 두 개의 붉은 구멍이 여전히 눈동자들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둑한 문밖에서 인선은 눈을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송이들이 깃털처럼 천천히 떨어지고 있어서, 사라지고 있는 박명 속에서도 결정들의 형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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