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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Jan 01. 2025

한국전쟁과 기독교⑫

제2장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 그리고 세력화

1부 전쟁
제2장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 그리고 세력화 (윤정란 著)     

1. 머리말

제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마자 북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를 신속하게 복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각 지역에서 자치 기구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군과 김일성이 평양으로 들어오면서 기독교인들은 점차 정치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물리적인 충돌에까지 이르렀다. 첫 충돌의 중심에는 한경직과 윤하영이 조직한 기독교사회민주당이 있다. 소련군 사령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기독교사회민주당 간부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한경직과 윤하영은 이 시간이 발생하기 전에 월남했다. 기독교 지도자로서는 가장 먼저 북한을 탈출했다. 월남 후 윤하영은 미 군정청 공보부 여론조사과장으로 일을 했으므로, 기독교 지도자인 한경직이 베다니 전도교회(이후 영락교회)를 설립하자, 월남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한경직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결집했다.     

 

월남한 이들이 남한에서 다시 모이고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면서 장로회 총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이 과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남한에서 장로회 총회의 주도권을 가장 먼저 확보하기 위해 주력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장로회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는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독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되자 이들과 경쟁을 벌였던 신사 참배 거부자(이하 출옥성도)들과 조선신학원 그룹은 장로회 총회에서 분리되어 각각 고신파와 대한기독교장로회(이하 기독교장로회)라는 별도의 교단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장로회 총회의 이러한 주도권 경쟁의 배경으로 친일 청산 문제, 신학상 견해 차이, 교단 내 주도권 투쟁, 선교사와의 관계, 진보와 보수, 장로교만의 특수한 교회 조직, 세속화 문제 등을 거론해왔다.¹ 이와 함께 고려해야 할 점이 한국전쟁기라는 특수한 상황이다. 즉, 한국전쟁기에 들어온 많은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선교사들이 관리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둘러싸고 많은 갈등을 빚었다. 강원용에 의하면 교회의 주도권 경쟁에는 선교사가 개입되어 있었으며,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교역자들은 전쟁으로 파손된 교회를 복구하기 위해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직접 관리하던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² 기독교세계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CWS) 한국지부장이던 핼럼 쇼록(Hallem Shorrock)도 구호물자가 한국 교회의 주도권 경쟁을 불러온 요인 중 하나였음을 지적했다.³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로교 주도권 경쟁의 배경을 살피기 위해 추가로 고려해야 할 부분이 한국전쟁 시기의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던 한경직을 대표로 하는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남한에서의 격심한 교권 투쟁에서 한국전쟁을 계기로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어떻게 확보해 주도권을 장악해갔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분열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교회 분열의 전개 과정과 한국전쟁 당시 한국 교회를 가장 많이 지원한 CWS의 구호 사업, 마지막으로 북장로교 선교사와 선교 자금, 북장로교 선교사와 월남한 서북출신 기독교인들의 관계 등을 밝혀볼 것이다. <계속>    


[필자 註]

1) 노치준, 「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 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 『해방 후 한국의 사회변동』(문학과 지성사, 1986), 11~48쪽; 양낙홍, 「1951년 한국 장로교 분열의 진상」, 《한국교회사학회지》, 20집(한국교회사학회 출판부, 2007), 157~195쪽; 이상규,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 분열과 연합에 대한 검토」, 《장로교회와 신학》, 3호(한국장로교신학회, 2006), 47~86쪽; 허명섭,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재형성』(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2009), 216~240쪽.    

 

2)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 2, 전쟁의 땅 혁명의 땅』(한길사, 2003), 155쪽.     


3) Hallem G. Shorrock Jr., Report of Korea Church Word Service Programs during 1960 and Plans for 1961(KCWS, 1961) p. 59. 최원규, 「외국민간원조단체의 활동과 한국사회 사업 발전에 미친 영향」(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6), 83쪽 재인용.    


영락교회(永樂敎會 Youngnak Presbyterian Church)는 서울 중구 수표로 33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 소속 교회로,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교회이다. 현재 담임은 김운성 목사다.     


[역사]

한경직 목사가 1945년 12월 2일 서울시 영락동 소재 천리교 경성분소를 미군정으로부터 종교 적산으로 불하받아 북한에서 월남한 피난민 중심으로 27명이 모여 설립한 베다니 전도 교회(영락교회의 옛 이름)가 영락교회의 모태이다.     


베다니전도교회는 창립 1년 만에 1500명으로 급성장하자 1946년 11월 교회 명칭을 영락교회로 바꾸고 1947년 한국에서 최초로 2부 예배를 실시하였으며 1949년에 교인이 6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949년 말 여순 반란 사건이 발생하자 교회가 연합하여 지리산 일대에 십자군 전도대를 파견할 때 1950년 1차 전도대에 참여하여 지리산 일대의 치안과 복음화를 하면서 전국 순회 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1950년 5월 350평의 2층 석조건물 교회당을 완공하고 한국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 영락교회를, 1951년에 대구 영락교회를, 1952년에 제주 영락교회를, 1961년에는 영락기도원을 설립했다. <출처 : 위키백과>    


북장로교(아메리카 합중국 장로교회)의 문장

북장로교 또는 아메리카 합중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약칭 PCUSA)는 1789년에 설립된 미국의 장로교 교단이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인 1861년도에 정치적, 지리적인 이유로 미국 남장로교회가 분파되어 나가면서 '북장로교'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1958년에 북미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와 합쳐 미국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약칭:UPCUSA)가 되었다. 초기 한국 선교 과정에서 미국 북장로교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Nevius Mission Plan)에 따라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내한

1884년 9월 알렌의 입국을 시작으로 외국 선교부의 한국 파송이 시작된다. 그 첫 선교부는 미국 북장로교였다. 1789년 조직된 미국 북장로교회(PCUSA·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는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알렌에 이어 언더우드 선교사를 파송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元杜于·1859∼1916)는 1885년 4월 5일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1858∼1902)와 함께 입국했다. 당시 국내 정세가 불안해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의 만류로 아펜젤러 부부는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하게 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비록 교파는 달랐으나 일생을 통해 가장 친근한 선교의 반려자로서 상호 협력했다. 영국 런던 출생인 언더우드는 13세 때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대학에서 문학을, 뉴저지주에 있는 화란개혁교회의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내한한 첫 목사 선교사였다. 그해 6월에는 의사 헤론(Dr. John Heron)이 내한했고,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됐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개척전도, 의료,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마포삼열(Rev. S A Moffett·1890), 배위량(Rev. W M Baird·1891), 소안론(Rev. W L Swallen·1892), 이길함(Rev. Graham Lee·1892) 목사 등이 내한하여 평양과 부산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선교지역을 확대해 갔다. 또 애덤스(Rev. J E Adams·1895) 목사 부부는 대구에, 밀러(Rev. F S Miller·1892) 목사는 청주에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그 후 계속하여 선천(1901), 안동(1909) 등지에 선교지부가 설립됐다. <출처: 국민일보,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13) 美·호주의 초기 선교사들(2011. 5. 26)>     

1893년 10월 미 북장로교회 선교사 사진. 중앙 앞 베어드 부부, 중앙 뒤 기포드 부부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 앞줄 왼쪽부터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린서. 뒷줄 왼쪽부터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새문안교회
선교사 W. 베어드가 1895년 부산에서 운영하던 한문서당(The Chinese School)
베어드가 1895년 부산에서 운영하던 한문서당(The Chinese School). 맨 왼쪽 앞에서 두 번째 줄 서상륜 조사, 세 번째 줄 베어드 선교사, 맨 뒷줄 부인 애니 베어드 선교사. 맨 오른쪽 앞줄은 보조교사(as little teacher)로 활동했던 서초시의 아들, 두 번째 줄 아담스(J.E. Adams) 선교사, 맨 뒷줄 어학선생 서초시. 1895~1896년 『부산선교지부 전도 보고서 Ⅱ』의 학교 보고서에 따르면 서초시 아들은 학생 수가 늘어나자 보조교사로 고용되었다.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126년 전 내륙지방 최초의 선교부를 개설한 베어드 : 선교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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