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영중 著 <인간 만세!> 중 발췌
러시아 문학 독서회
8월 과제독서 복습
구원, 지금 이곳의 문제
돈, 치정, 살인–이 세 가지 주된 소재에 미루어 본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틀림없는 통속 소설이다. 시쳇말로 ‘막장’ 드라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두고 싸우고, 동생은 형의 약혼녀를 넘보고, 추악한 유산 다툼이 벌어지고, 돈뭉치가 오가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보이고, 법정공방이 이어지고…. 이보다 더 ‘싸구려’ 소재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이 극도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들을 한데 엮어서 인간 구원에 관한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대하소설을 만들어 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 모든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관한 소설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인간 연구를 마무리 짓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하고 악하며, 동물적이면서 신적인 것을 지향한다. 이토록 모순적인 성정은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지적한 바 그대로 인간에게 기쁨일 수도 있지만 엄청난 고통이기도 하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합일에 도달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에서 심오한 비극이기도 하다. 질병과 빈곤을 비롯한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은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모든 삶의 조건이다. 게다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이 분명한 사실 앞에서 인간은 때로 분노하고 때로 더욱 광포한 탐욕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때로 무한히 겸손해진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죽음의 확실성에 반응하건 거기에는 언제나 실존의 근원적인 비극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이중성, 삶의 유한성, 고통과 죽음이라고 하는 인류 보편의 비극을 직시했고 선택의 갈림길에 선 인간의 처절한 절규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 모든 비극성을 뛰어넘는 어떤 것, 인류를 보편의 운명에서 구원해 줄 어떤 것을 끈질기게 추구했다. 그래서 구원에의 희망은 그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공통분모가 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구원을 향한 저자의 희망이 가장 극명하게, 그리고 가장 예술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이때의 구원이란 ‘영혼의 구원’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애매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본성과 신의 형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간이 지금 이곳에서, 오늘의 현실 속에서 내면의 악을 물리치고 ‘다시 태어나’ 본래의 존엄성을 되찾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이 결국 전 인류의 상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 깊이 새겨진 종교적인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19세기 러시아라는 제한된 배경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넘어 시공을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결국,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한 구원은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이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테두리를 뛰어넘는다. 그에게 구원이란 죽은 뒤에 지옥으로 떨어진 영혼들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구원은 지금 이곳의 문제,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가 결단을 거쳐 실현해야 하는 윤리적인 문제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화두인 구원의 문제를 실존의 문제로 ‘줌인’시킨 것이다. (2024년 6월 6일 페북 그룹 방 '러시아 문학 읽기모임'에 올린 글)
<(IV) 휴머니즘 소설>에서 계속
구원의 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구원은 단순히 종교적인 개념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고통, 죄, 자유, 사랑 등과 깊이 얽힌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중심 주제로 다뤄진다.
1. 고통과 죄를 통한 구원
등장인물들은 각자 죄책감과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드미트리는 아버지 살해 혐의로 감옥에 갇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죄와 삶을 성찰하고 내면적 구원의 가능성을 엿본다. 또한 이반은 신의 정의와 인간 고통의 문제 앞에서 깊은 회의에 빠지지만, 그 안에서도 이성의 한계와 도덕적 책임을 자각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감내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구원의 가능성에 가까워진다고 보는 것이다.
2. 사랑을 통한 구원
소설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알료샤는 기독교적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며,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이상적인 구원의 모델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정신적 스승인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타인을 이해하고 조건없이 사랑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그 사랑은 죄인조차 포용하는 사랑, 인간의 비참함을 함께 감싸 안는 사랑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조건 없는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열쇠라고 말한다.
3. 자유와 선택
작품 전체에 흐르는 주요 질문은 "자유는 축복인가, 저주인가?"다. 이반의 '대심문관' 장면에서는 인간이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노예가 되길 원하는 모습을 풍자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자유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구원의 조건이며, 진정한 사랑과 선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유 속에서 죄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 자유로 회개와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이 선택이 바로 구원의 길인 것이다.
4. 공동체적 연대와 구원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모두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는 개인의 구원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서로에 대한 책임과 연민을 느낄 때, 함께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말하고자 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요약하자면, “죄와 고통 속에서 사랑과 자유를 통해 책임 있게 살아가려면 내적 변화와 타자와의 연대를 통한 존재의 회복”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