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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은 30만을 어떻게

그때 그 숫자가 옳았을까?

고전(古)사극을 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다.


그 중에서 한가지 손으로 꼽으라하면

전장터에 동원된 군사(軍士)의 수효이다


수문제(隋文帝)가 30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그는 5~6만을 남기고

크게 패퇴한다.


이후

수양제(隋陽帝)는 100만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는 을지문덕에게 참패하고

약2,700명만을 데리고 돌아갔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30만군사를 데리고

고구려를 침공(侵攻)했다..

결국 고구려는 나당(羅唐)연합국에 의해

멸망한다.

고구려 시대 인구를 추정해보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11세기에 려시대에  210만

이옥( 李玉)은 약130만

신형식(申瀅植)  고구려사에서 약130만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료를 보면

인구조사한 기록이 없기에

이런 자료 또한 추정치에 불과하여

정확도가 떨어진다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8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진짜일까?

이러저러한 면에서 추측해본다.

첫째 대군(大軍)이 이동할 때

이들이 먹어야 하는 식량(食糧)이다.

당시 수많은 군인들에 필요한 식량의 양은

어느 정도가 될까

특히   저장능력(貯欌能力)이나 냉장시스템도 없을 때, 어떻게 식량을 이동했을까?

사람 만이 아니라 말들의 먹이는 어떻게?


둘째 이렇게 많은 군사들의 배설(排泄)한 내용물의 양도 어마어마하리라. 군사들이 타고 이동하는 말의 배설물은 어찌 되었을까?

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했을까?


셋째  도로망(道路網)이나 도로상태(道路狀態)도 지금과 달리 험난(險難)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군사들이 이동할 때, 자연스럽게  사고도 많았으리라.


넷째 이동수단을 보면,  극히 일부는 말을 탔지만, 대부분은 보행(步行)을 통한다.  중국 만주 벌판과 숲. 바다를 건너 왔을 때 중간에 이탈하는 일과 병이 들거나 쓰러지고 죽는 경우도 많으리라

게다가 산과 숲, 늪과 골짜기가 많은 험산준령을 통과할 때, 어떻게 했을까?


다섯째 전쟁할 때 사용하는 엄청난 양의 무기이다.  활과 화살. 칼과 창 그리고 방패의 양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여섯째 명령의 전달체계와 전달방법이다.

"나를 따르라"  "공격하라" "퇴각하라"

이런 명령을 전달할 때 어떻게 수행했을까?


마지막으로 걸어서 이동하는 군사들의 취침과 세면과 목욕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런과정은

나의 머리로는 계산도, 추측도 쉽지않다.


우리는 종종  이런 장면을 드라마, 영화, 소설로만 대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과정을 묘사하거나 기술했던 기억은  전혀 없다.


가끔 과거 국민학교 1~6학년 전체학생이

학교 운동장에 집결했을 때 엄청난 수효의 아동을 본다.

1960년대 한반에 80명 한학년에 12개반

이들이 모두 모이면 80×12×6=5.760명이다.

그런데 30만 대군, 80만대군, 100만대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까?

가끔 1980년대 여의도광장에  100만명이 집결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지만, 실제로는 30만도 되지않는다고 경찰추계로 보도되었다. 이또한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그런데 그 오래전에 이 정도 규모의 군사는 엄청난 것이다.


과연 가능했을까?

어떻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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