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주의를 위한 이론적 배경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칸트는 왜 빌런인가.obj (역사상 가장 사악한 철학자 - YouTube
르네상스부터 산업혁명에 이르는 몇 백년의 기간에도 기독교를 포함한 신비주의와 종교는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플라톤과 그의 계승자는 죽어가는 신비주의적 철학의 불씨를 살려 계승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자본의 축적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신비주의자 빌런들은 뒤에서 몰래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신앙을 다시 왕좌에 앉히고 그 앞에 인간을 꿀어앉히게 할 수 있을지를 밤낮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왔다.
그리고 그들은 18세기 후반에 그 방법을 결국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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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그는 누구보다도 반아리스토텔레스 혁명을 성공적으로 개시하고 전파한 철학자였다.
칸트의 철학은 계몽주의를 종식시키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계승자들이 종교적 폭압에 맞서 힘겹게 열어뒀던 이성의 문을 쾅하고 닫아버린 빌런이다.
칸트는 하나의 물샐틈 없는 철학 체계를 세우기 위해 평생을 바쳤는데,
그런 철학 체계에서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는 바로 과학의 공격으로부터 종교를 구해내는 것과,
종교적 교리로부터 파생된 윤리학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철학은 플라톤의 신비주의를 계승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엄청나게 변형된 버전이기는 하지만 둘다 신비주의라는 입장에서는 이 두 철학은 본질적으로 같다.
칸트의 공격 방법은 바로 존재론을 인식론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수법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감각 데이터를 가공하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가공’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머리 속에 12개의 범주가 있어서 감각 데이터가 이 범주들에 의해 필터링되고 왜곡되고, 재조합되면서 현실이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 경험이든 내부에서 일어나는 추상적 사고이든 가리지 않는다.
이성은 그것이 외부의 것이든 내부의 것이든 인지 과정에서 원래 그것인 ‘물자체’를 왜곡해 진실을 알 수 없게끔 만드는 왜곡장치라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개념도 전부 인간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바퀴벌레에게는 바퀴벌레라는 종이 왜곡한 현실이 있고,
돼지에게는 돼지라는 종이 왜곡한 현실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이라는 종이 왜곡한 현실이 있다.
모든 현실은 구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구성주의적 현실론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칸트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그림자 세계와 진짜 세계라는 두 개의 현실을 수용하고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어서 말하자면 현상계와 예지계가 그것이다.
현상계는 감각을 통해 구성되는 왜곡된 현실, 즉 인간이 인식한 물질 세계, 가짜 세계를 말한다.
그에 비해 예지계는 감각을 통하지 않는, 왜곡되지 않은 물자체의 현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물자체가 있는 진짜 세계를 말한다.
여기에서 플라톤과 칸트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플라톤은 플라톤주의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신비주의자였지만 또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적 합리성을 가진 이교도인이기도 했다.
물론 비합리적이고 말이 되지 않지만, 플라톤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 진리에 닿을 수 있다며 인간의 이성을 존경하고 찬양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이성 자체의 오류와 불완전성, 병적인 장애를 선언함으로서 진리에 닿으려는 인류의 열망과 의지를 송두리째 불태워버렸다.
칸트 자신의 입장에 따르면 이성은 자체의 한계로 인해, 바로 이성때문에 현실의 참모습을 그 어떤 것도 발견해낼 수 없다.
따라서 칸트에 의해서 논리와 과학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논리와 과학은 현상 세계의 데이터를 정리해서 인간이 구성하고 만들어낸 가공의 현실만 설명하고 기술할 뿐, 실제 모습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을뿐이다.
'그 입을 닫아라'라고 말할 뿐이다.
신비주의자들과 중세 시대 마녀사냥론자들, 그리고 교황과 전체주의자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지 않는가?
칸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랬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회의주의자로 남고 말았을 것이다.
칸트는 회의주의자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에 결국은 교회의 적이 될 것이 분명함을 미리 알았던 모양이다.
머리를 굴리던 칸트는 책을 한 권 더 발표한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완전히 이성을 의심하고, 이 세계를 알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없음을 공포한다.
처음에는 이성으로는 물자체에는 접근불가하다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현실을 알아낼 수 없다며 합리주의자, 상식론자들을 꼬드겨 회의주의자로 낙담시켜놓고는, 그 다음에는 말을 싹 다 바꾸고는 물자체에 접근할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신을 인정하고 신에 대한 믿음, 곧 신앙을 갖는 것만이 현상과 실체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며 이번에는 회의주의자들을 하느님의 종이되도록 전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개고생을 해서 근대에 들어섰는데, 또 다시 중세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서양철학사를 쓴 버틀런드 러셀도 이런 칸트의 개소리를 눈치채고는 이렇게 비난했다.
“칸트는 적어도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흄의 인과성에 대한 비판으로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선잠에서 깨어난 것도 잠시일 뿐 곧 자신을 다시 잠에 빠뜨릴 최면제를 발명했다.”
<<서양철학사>>, 버틀런드 러셀
불행한 점은 칸트만 이 최면제를 복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시대와 그 후대 사람은 그로 인해 전부 선잠에 빠져버렸다.
이제 종교는 그 무엇도 반박할 수 없는 철옹성이 되어버렸다.
믿음을 진리로 선언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제 합리적인 방법, 즉 이성과 논리, 과학으로는 절대로 하느님과 신,
그리고 사후 세계를 반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논증으로는 아무리 객관적 증거가 많고 강력하더라도 인지적 구조에 의해 이미 왜곡된 현상 세계에 대한 증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므로 논박은 언제나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쉽게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들은 언제나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가 이성에 대한 전쟁에서 승리했으므로 종교가 가진 도덕 관념, 윤리학도 전부 승리하게 되어있다.
윤리와 관련하여도 칸트는 이제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칸트에게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 칸트의 필생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는 바로 과학의 공격으로부터 종교를 구해내는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윤리학을 복구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신을 지켜야 했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능력을 폄훼하고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능력까지 끌어내려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 목표를 달성했을까?
칸트는 우리의 순수 이성, 즉 무언가를 알아내는 지성 능력에만 범주가 국한되지 않는다며, 인식론적 범주에서 범위를 넓히고는 윤리적 범주를 추가했다.
인간에게 내재된 윤리적 범주, 이것을 칸트는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고 명명했다.
이걸 간단히 ‘양심’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칸트의 사악함은 여기에서 다시 한번 드러날뿐이다.
그가 말하는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의무를 말한다.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정언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의무적인 행동, 이타적인 행동을 위해서 개인적인 욕망, 이기적인 충동을 억누르고 거부해야 한다.
그렇다.
칸트의 도덕은 무조건적인 의무이다.
그가 말하는 선행은 하는 사람의 보람이나 기쁨을 위해서도 아니고, 선행을 받는 사람의 삶의 질이 더 나아져서도 아니다. 의무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실익이 없어도 무조건 해야하므로 무조건 해야하는 행동들의 집합일뿐이다.
칸트의 입장에서 선한자는 누구일까?
원래 착해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사람?
발 받을까봐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사람?
사람을 칼로 찌르고 돈을 훔치고 칼로 찌르고 살해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정언명령, 즉 의무에 따라
악한 행동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악인만 선하다.
원래 착해서 봉사정신이 가득한 사람이나, 주는 것을 행복해하는 사람에게도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다.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칸트의 윤리학에 따르면 자선과 기부로 기쁨을 얻는 사람은 ‘주고싶다는 욕망’을 이기적으로 충족되는 행위에 사로잡혀있으므로 아무리 많은 선행과 자비를 베풀어도 그의 행위는 아무런 도덕적 선이 없다.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 해도 그렇다.
그것이 삶을 끝내고 싶은 비관주의자나,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고귀한 가치로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성자들의 희생은 아무런 도덕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절대 죽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의무이기에 죽기로 결심해야만한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희생을 교육하고 장려할뿐만 아니라, 희생을 강요하는 이타주의 철학의 효시가 된 장본인이 바로 칸트다.
칸트는 이타주의의 핵심 덕목인 자기 희생을 의무로서 이론적으로 역사상 최초로 확립했기 때문이다.
칸트의 도덕관에 따르면 인간은 의무로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의 관심, 장래희망, 행복, 삶의 목표,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갖는것은 그 이익이 무엇이든 악하며, 이기적인 사람은 짐승과 같다.
이타주의에서는 희생만이 도덕적 선이며 유일한 가치이다.
왜 그럴까?
희생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희생을 멀리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사악하다.
그런데 희생은 왜 의무일까?
정언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칸트에 따르면, 당신이 가장 살기를 갈망하는 순간에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가장 높은 등급의 천국에 갈 수 있다.
개그라고 생각하는가?. 그의 철학에 따르는 당연한 귀결일뿐이다.
그는 도덕에서 행동하기로 결정할 자유의지와 한 개인의 삶의 목표와 가치를 소거시켜버렸다.
그저 규율에 따라 로봇처럼 행동해야만 하는 존재로 격하시킨자가 바로 칸트다.
처음에는 인간을 불완전하고 왜곡된 존재로 격하시킨 후,
과학을 물리치고 신을 끌어들여 중세시대로 회귀한 후,
인간의 고귀하고 숭고한 행동의 이유까지 모조리 말살시켰다.
이제 인간에게 남은 객관적 가치란 남아있지 않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비굴하고 처참한 자기 희생뿐이다.
칸트가 평생을 다해 인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무너뜨리기위해
불철주야 궁리했고 그리하여 그는 물샐틈없는 철학 체계를 완성했다.
사실 치밀한 철학이라고 해봤자, 동시대 철학자 그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만큼
알아볼 수 없는 길고 긴 문장에 문장을 겹쳐 쓰며, 온갖 어려운 용어로 치장한
요점과 한없이 빗나가며 오히려 요점을 흐리는 수법을 반복하며 말도 안되는 불합리한 추론으로 1000페이지 가량을 가득채우는 수법을 활용했을뿐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을 죽이고 신을 살리자는 뻔한 결론을 위해서다.
칸트의 주관주의 철학은 사후 200년 이상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인류의 절대적인 악의 선두자였던, 마르크스주의, 나치즘에 가장 큰 교두보가 되었으며 요즘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예쁜 말로 포장된
반이성주의에 가장 큰 든든한 학문적 배경으로 자리잡았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라!” 라며 계몽을 부르짖었다고?
수 천 페이지를 읽다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껀덕지 몇 개쯤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칸트는 사실 이성을 그 누구보다 폄훼하였으며 이성늘 갈기갈기 찢고 토막내어 형체를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한 후 이성의 시신까지 안보이는 곳에 유기한 장본인이다.
우리는 결코 잊어선 안된다.
칸트는 인간의 본성을 모독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철학을 고안낸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