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는 상호작용이다
난 크고 작은 시도들을 의식적으로 행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시작하기 두려운 걸 접하고, 왠지 부끄러운 걸 하나씩 해보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항상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도전”을 “시도” 로서 바꾸는 일이다.
난 도전하고 싶은 것들에 “시도”라는 명목을 붙인다.도전과 시도의 차이는 결과에 중점을 두냐, 아니냐에 있다. 도전은 결과가 명확하지만, 시도는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난 최근에 토론토의 길바닥에 앉아 작은 팁 박스와 함께 라이브 드로잉을 했다.
다만 이 행위 자체에는 목적이 없다.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그저 결과를 바라지 않으며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것. 기대를 하지 않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모든 가능성을 열고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받아들인다 “는 자신에서 의의가 있다.
사실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보여준 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미친 듯이 떨리는 일이다. 시선이 노출되는 만큼 그 시선을 더 신경 쓰게 된다.
다만 이 시점에서 “ 난 사람들에게 멋진 그림을 보여줘야지 “ “이 그림을 예쁘게 완성하고 가야지” 가 아닌, “ 사람들 앞에서 그림을 집중해서 그려봐야지” 가 되면 조금 더 부담 없이 시도를 할 수 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똑같다. “ 난 모임에 나가 무조건 한 사람과 친해져야지, 관계에서 뭔가 얻고 가야지 “ 가 아닌 “모임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봐야지” 가 되면, 예상치 못한 소중한 결과들을 보통 얻는다. 그게 나 스스로 시도를 했다는 용기가 될 수도 있고, 소중한 친구일 수도 있고, 경험과 그 행위를 했다는 사실 자체일 수도 있다.
시도도 하나의 근육 같다. 연습을 많이 할수록 단련된다. 물론 많이 시도를 해도 여전히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이후 한번 더 할 수 있는 약간의 뻔뻔함(?) 정도는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후 되돌아볼 때, 그 작은 시도에서 파생된 모든 것들이 현재의 다채로움과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내가 느끼는 시도의 감각은 엉성함이다. 왠지 미숙해도 괜찮을 것 같고, “그냥 한번”. 해본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담 없이 해보는 용기가 주어진다. 하지만 그 엉성한 시도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시도는 필연적으로 외부를 자극하고, 결과를 산출해 낸다.
하나의 시도는 부끄럽고 괜히 싶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극은 내가 “또 다른 시도를 해볼 기회“ 로 탈바꿈한다.
내 시도는 세상에 내 한 조각을 더 내보이는 일이며, 바깥과 상호작용하는 일이다.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시도를 생각보다 더 좋아하며, 생각보다 더 자극을 받는다.
시도를 해 본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안 해봤던 것을 해본다는 건데, 이미 그 행위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 내 세계에서 길이 더 열리게 된다.
모든 시도는 연결점을 만들고, 미래에서 하나씩 연결되어 생각보다 긴밀한 인과관계를 나타낸다.
어딘가 미숙하고 엉성해도, 결국 그 시도는 이후 도전이라는 테두리가 자연스레 씌워지게 된다. 내 시도는 한 결과가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무언가 도전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냥 시도하는 거지 “라는 말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