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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알 바 아니야. 나만 아니면 돼!

공존이라는 이름의 아이러니(일용할 양식 양귀자)

by 희서

논술 공부방을 운영하며 감사한 날도, 을 일도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종종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가, 아득한 날을 손에 잡히게 만들기도 했다. 그에 못지않게 황당한 일도 제법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기이해서,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수업은 늘 아이들 하교 후에 이루어지므로, 오전 시간엔 조금의 여유가 있는 편이다. 물론 여유라는 말이 무색하게, 집안일하고 수업 준비를 마치고 나면 운동할 시간조차 빠듯하긴 하다. 어쨌든, 그날도 그런 평범한 하루였다.


드르르릉 드르르릉


소를 마치고, 운동을 나가려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OO 논술 교실이죠? 저 이 1시에 담 좀 가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마침 아이가 오늘 학교를 안 가서 같이 가고 싶은데."


시간은 금보다 귀한 법. 나름대로 짜인 스케줄에 균열이 생기는 게 내심 못마땅했지만, 최근 결원된 자리를 떠올리며 상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10분 전 1시,




[일용할 양식]에 나오는 경호 아버지는 어지간히 돈을 모은 모양이다. '김포쌀상회'가 바야흐로 '김포슈퍼'로 변모된 걸 보면 말이다. 쌀과 연탄만 취급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응당 상호에 걸맞게시리 온갖 생필품을 진열대에 메우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원미동 23통 5반 사람들은 이런 경호네의 성공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내외간이 성실한 일꾼인 데다가 어른 볼 줄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형제슈퍼의 김 반장은 속이 속이 아니었다. 네 명의 어린 동생과 다리 골절로 직장을 잃은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어머니,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까지 모두가 그에게 매달려 있었으니 말이다.


김포슈퍼의 성공은 형제슈퍼의 위기였다. 이 조그마한 구역에 똑같은 구멍가게가 마주 보고 앉았으니 다 같이 죽자는 형상 아니겠는가. 김 반장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고는 꾀를 낸 것이 김포슈퍼보다 물품을 더 싸게 파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포슈퍼는 곧바로 더 싼 가격을 내놓았고,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결국 두 가게는 밑지는 장사를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띵동


초인종 벨이 울렸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논술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 거실에 책이 별이 없네요."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거실을 샅샅이 둘러보는 모습이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몹시 불편하였지만,


"아, 책은 방에다 두었어요. 거실을 넓게 쓰고 싶어서요. 수업은 여기에서 하고요."


학년별 수업 커리큘럼과 필독서, 부교재 사용. 수업 시간, 수업료까지. 모조리 빼놓지 않고 묻는 그녀의 노련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지만,


"더 궁금하신 것 있나요? 어머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지만, 아이들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상담 종결을 위해서 마무리 멘트를 하려는 찰나,


"엄마, 빨리 가자. 수업 시간 다 됐어."


입을 자물쇠로 잠근 듯 조용하던 그녀의 아이가 빗장을 푸는 순간,


우리 엄마 논술 수업해요.


역시 아이들은 거짓말을 못 하는 법. 그래서 이 나라 미래 희망 있는 법. 아니, 그런데 왜 아이의 엄마는 거짓말을 하느냔 말이다. 자신을 밝히지 않은 것뿐이, 거짓말이 아닌 건 또 아니었나? 그녀들을 보내고, 머리가 지끈거려 한동안 자리에서 떠나질 못했다.




그 웃음 많던 경호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질 즈음, 별안간 '싱싱 청과물'이란 간판을 건 새로운 점포가 원미동 골목에 들어섰다. 동네 여자들만 신이 났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옛말은 틀린 말이라며, 고래들이 싸우는 통에 새우들이 먹을 게 많아졌다며.


[일용할 양식]을 읽으며, 잘잘못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성실함으로 하루하루를 일구던 경호네, 위기의 순간에도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던 김 반장, 낯선 골목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희망에 부풀었던 싱싱 청과물. 그 사이에서 이득을 좇아 웃고 떠들던 동네 여자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쪽도 딱 부러지게 죽을죄를 지은 게 아닌데.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인데. 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하는 이 현실이 서글플 뿐 것을.



아이들과 수업하다 보면 "내 알 바 아니야. 나만 아니면 돼."란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아직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왜 나오는 걸까?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공존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정작 아이들에게 보여준 어른의 삶은 그 말과 같았을까. 내 일만 무사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갖진 않았는지, 불편한 일에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는지. 그런 어른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내 알 바 아니야"를 가르친 건 아지.


이 순간 가장 진실했던 사람은 논술 상담을 받으러 왔던 그녀의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공존을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단편에서 건져 올린 한 줄기 개똥철학

공존은 말로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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