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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cey J Apr 08. 2024

초록의 꿈  

찰나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것 

몇 년 전 자연으로 이사를 오며 가장 강렬히 남은 기억들.
첫번째는 역시 칠흙같은 밤의 공포스러움이다. 내가 알던 도시의 밤과 달리 이곳의 밤은 어떤 불빛도 없이 새카맣다. 어쩌다 보름달이 뜨면 높은 천장에 난 창문을 통해 하얀 달이 침대에 누워있는 몸을 네모나게 비추었다.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풀벌레 울음소리, 무언가 부스럭 움직이는 소리, 알 수 없는 동물의 울음 소리가 쉼없이 들려왔다. 

무서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는 순식간에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미지의 세상이 어둠 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숲 속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매일 밤 창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커튼을 닫았다.  


이른 아침 동쪽 하늘은 핑크빛으로 아름답게 물들며 새로운 날을 알렸다. 

아직 가시지 않은 밤의 여운이 초록 풀에 달랑 맺힌 이슬로 남아있었다. 새들은 높은 곳에서 노래한다. 

새벽 공기의 싱그럽고 청아한 내음,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세상은 지극히 순수한 생명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 경험하기 전에 미처 몰랐던,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생생한, 살아있는 에너지였다. 

한 발을 내딛어 그 속으로 들어가 호흡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면 밤새 탁해진 몸과 정신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깊은 고요함 속 만물이 깨어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새벽녘이 지나 하늘이 완전히 밝아오자 언제 그런 일들이 있었냐는 듯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건 원래 내가 알고 있는 익숙한 아침의 모습이었다. 모두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신비로움을 모른 채 살았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마법과도 같은 순간의 달콤함을 계속 맛보고 싶었다. 








두번째는 봄의 폭발적 에너지이다. 도시에 살던 시절, 어느 날 문득 길가에 개나리와 목련이 눈에 들어오면 비로소 봄이 온 것을 알았다. 언제 어떻게 봄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방이 숲과 강으로 둘러싸인 이 곳의 봄은 얼어붙었던 건조한 땅에 미세하게 따스한 기운이 감돌면서 시작된다. 아직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자세히 보면 누구나 볼 수 있을 아지랑이같은 봄의 기운이 땅 위를 빙빙 맴돌면 며칠 내에 엄지 손톱만한 작은 싹이 돋아난다. 잡초들이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스노우드롭이 고개를 내민다. 아직 피지 않은 수선화는 대파같이 건강한 초록의 길쭉한 잎을 쭉쭉 뻗어낸다. 슬슬 봄이라는 전차에 시동이 걸리는 느낌이다. 여전히 밤공기는 매섭고 갑작스러운 눈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봄을 알리는 스노우 드롭 


벚꽃이 사르륵 소리없이 피어날 무렵, 이 곳에서 가장 흔한 꽃 중의 하나인 수선화는 노란 물결을 이루고 나무들이 새 순을 틔운다. 어제와 오늘이 비슷한 4월의 하루하루가 가고 5월에 가까워지면 한낮의 태양이 뜨거워지면서 아무도 멈출 수 없는 기세로 봄이 폭발한다. 느릿느릿 한 걸음씩 내딛다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러너처럼. 정원의 잡초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고 작약, 튤립이 화려한 꽃잎을 경쟁하듯 펑펑 터뜨린다. 거대한 나무들은 그새 연초록 잎을 드리우고, 도그우드의 하얀 꽃은 수놓인 베일처럼 아름답다. 채소 정원에 겨우내 사라졌던 민트와 레몬밤이 이미 무릎만큼 무성히 자라 있다. 그들의 생명력은 굉장해서 잎이 자라는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생명들이 각자의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이 광경이 너무 신기하여 주저않아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한 편의 드라마나 연극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달려가는 것일까? 

여태 나는 봄이 가만가만 얌전하게 오는 줄로만 알았다. 

사계절이 바뀌는 몇 번의 사이클을 매일매일 관찰한 결과 여름의 절정이란 사실 멈춤과 비슷한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폭발할 듯 전력질주하는 봄의 엄청난 에너지는 잠들어 있던 만물깨워 한번의 생을 틔우고 끝까지 집요하게 성장시킨다. 힘을 다하여 꽃을 피우고 돌돌 말린 잎사귀를 활짝 펼쳐낸다. 

그렇게 최정상에 올라 꼭대기서 잠시 멈추었다가 내리막에서 저절로 돌아가는 바퀴같이 남은 계절을 수월히 달리고, 마침내 완전히 멈추어 긴 잠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한여름은 아무리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봄보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이미 해야할 일을 다 해놓은 부지런한 농부처럼. 





자연을 관찰하다보면 저절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 

우리의 인생이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끊임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초록의 아름다움이 찰나임을 안다. 

찰나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있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 

어제의 햇빛이 오늘과 다름에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한 시도 머무르지 않고 변하는 하늘과 우리의 마음이 같음을,

새벽의 순수한 공기처럼 우리의 본성이 티없음을 알려준다. 


어떤 상태를 선호하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거두고

숲 속의 나무같은 평정심으로 

기세좋은 민트잎처럼 최선을 다해 나다움을 펼쳐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삶이고, 사랑이며, 유일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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