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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 blue Nov 15. 2023

바나나 트라우마

   점심으로 카레를 만들려고 냉동실을 열었다. 열자마자 주먹만 한 아이스팩이 발등 위로 떨어졌다. 하필이면 뾰족한 모서리를 맞아 한동안 찌르르했다. 나아지는 것 같아 산책도 하고 일상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한밤중 자다가 욱신욱신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다. 아쉬운 대로 얼음찜질을 하고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 일로 냉동실 문을 열기가 망설여졌다. 가급적 냉동실을 사용하지 않고 꼭 할 일이 있으면 두꺼운 슬리퍼부터 찾아 신었다. 그걸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엉덩이를 뒤로 쭉 뺀 다음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서 냉동실 문을 열었다. 내 부주의로 뜻하지 않게 트라우마를 얻었다.   

  트라우마는 괴롭힘을 당하거나 굴욕스러운 상황에서 비롯되지만나처럼 가벼운 사고에도 생길 수 있다. 내게는 평생 극복하기 힘든 오래된 트라우마가 더 있다. 중학생 때 길 가다 죽어 있는 뱀을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던지 앞뒤 재지 않고 길을 건너다 하마터면 달려오는 차에 치일 뻔했다. 그때 한 발만 늦었더라도 아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그 뒤 뱀은 물론 뱀처럼 구부러진 것만 봐도 자지러지게 놀라 도망친다. 텔레비전 같은 데서 뱀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다. 

  학교에 치료받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가진 아이, 강박증을 가진 아이, 뭐든지 물어봐야 안심하는 불안증 아이들로 교실은 늘 아슬아슬하다.  

  로운이는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였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으면 책상을 뒤집어엎고 떠나가라 악을 쓰며 울어대 교실을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일단 한 번 끓어오르면 차분한 대화가 불가능하기에 스스로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했다. 한 아이로 인해 교실 분위기가 엉망으로 되어도 교사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날뛰는 아이를 달래 평상심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무 자극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시 우리 반 아이들 사이에 암암리에 존재하던 법칙이다. 은연중에 내 입에서 그런 말이 자주 나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함께 지내는 교실에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학급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로운이에게는 자극이고 도발이다. 반장 선거, 달리기, 우수 모둠상, 급식 순서, 경쟁과 도전활동이 많은 체육시간까지 문제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을 꼽으라면 단연 피구다. 그렇게 좋아하는 피구를  마음껏 즐기기 어려웠다. 로운이 때문이었다. 경기 규칙을 무시하는 건 당연하고 질 것 같으면 훼방을 놓았다. 옐로우카드를 줘도 통하지 않고 경기에서 아웃을 시켜도 소용없었다. 번번이 경기가 중단되었고 아이들도 점점 하기 싫어했다. 한 번은 로운이 엄마가 오시면 괜찮을까 하고 지켜보게 했다. 여늬 아이들처럼 경기를 즐기는 모습에 몹시 의아했다.

  오월이 되면 학교마다 모범 어린이 한 명을 뽑아 학교장 이름으로 상을 준다. 받지 못한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사기가 죽고 받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부담스러운 상이다. 학교 전통이기도 하고 우리 반만 빠질 수 없어 아이들의 추천을 받아 명단을 내기는 한다.

  그날도 모범어린이상의 취지를 알려주고 추천하도록 했다. 당연히 로운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뽑혔다. 

 ‘아차!’

  상 받을 아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따가운 눈길이 느껴졌다. 힐끗 보니 로운이가 강렬한 레이저를 쏘아대고 있었다. 자기 이름이 불릴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화가 난 것이다. 그렇다한들 이제와서 어떻게 하겠어, 방심하고 있는데 뭔가가 휙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딱!”

  칠판을 맞고 바닥에 떨어진 건 노란색 바나나 모양의 필통이었다. 빗맞았기 망정이지 일 초만 늦었어도 정통으로 얻어맞을 뻔했다. 어쩐지 볼이 얼얼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괜찮아요?”

  불행하게도 몇 아이가 필통 던지는 장면을 본 모양이다. 창피한 건 둘째 치고 로운이를 빨리 진정시켜야 했다. 평상시에는 우스갯소리도 잘 하고 명랑하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로운이가 자기가 안 뽑혀서 속상했나 봐. 화가 나서 참기 힘들었나 봐.”

  아이들에게 이해를 구했다. 다른 아이가 그랬더라면 그냥 봐 넘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로운이를 상대로 교권 침해를 호소할 수도 없고 그런다 한들 뭐가 달라지지도 않으니까. 

   그런 일이 잦아지니 가능하면 경쟁적인 활동이나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게 되었다. 로운이 때문에 우리 반 아이들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와 즐거움을 포기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의 표정이 우울하고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 역시 하루하루 롤러코스터를 타느라 감정적으로 많이 지쳐갔다.

 “선생님, 로운이 치료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떤 아이가 보다 못해 말했다. 가만히 그 아이를 쳐다봤다. 

  ‘난들 그러고 싶지 않을까? 백 번이고 그렇게 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는 걸?’

  무력감에 기운이 쭉 빠졌다.    

  설령 나처럼 필통으로 얻어맞을 뻔해도 학부모에게 치료하라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학부모에게는 정서학대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학부모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이가 그럴 리 없어요. 엄마 말도 잘 듣고 동생도 얼마나 잘 보살피는데요.”

 “학교에만 가면 그러는데 선생님이 문제 있는 거 아니예요?”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럴 때는 그저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을 빠짐없이 알려주고 학부모 스스로 어떤 처분을 내려주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로운이 어머니와는 말이 잘 통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로 나타난다. 로운이가 학교에서 벌인 여러 결과들도 마찬가지로 분명히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로운이가 그동안 집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로운이와 가족들과의 대화를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로운이는 감정적으로 억압당하며 살았다. 부모가 지나치게 엄격하고 무서운 잣대를 들이대는 바람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한창 어리광부릴 나이에 제 감정을 표출할 기회를 잃은 로운이는 그 불만을 부모가 아닌 학교에 와서 풀었다. 로운이 어머니는 로운이가 집에서는 말 잘 듣고 착하니까 문제가 없는 줄 알았을 것이다. 딴에는 잘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로운이가 벌인 끔찍한 행동은 로운이도 나도 원한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문제는 그런 결과를 낳게 한 원인을 해소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미완의 그릇이다. 마치 흙으로 그릇을 빚는 일과 같아서 작은 힘만으로도 그릇의 형태가 일그러진다. 일그러진 그릇을 다시 바로잡으려면 처음 그릇을 빚는 일보다 훨씬 많은 힘을 들여야 한다.

  “다시 흙 다지기부터 시작해요.”

  이렇게 말했다. 부서지지 않고 구부러지지 않고 모나지 않으려면 흙속의 공기를 빼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시작하는 일이니 서두르지는 말자, 그렇다고 쉬어도 안 된다. 좋은 습관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나쁜 습관은 한순간 나뭇잎이 병들어 떨어지듯이 생기고 만다. 흙을 천천히 다지면서 마음속으로 단단하고 균형 잡힌 그릇을 상상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미완의 흙덩어리다. 그 흙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 대화를 통해서 추측할 뿐이다. 다만 어떤 흙이든 각기 다른 질감과 색깔로 쓸모있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신념을 갖고 알려주고 노력할 뿐이다. 

  로운이 부모는 자신들의 양육 방식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행동보다 중요한 건 생각의 변화다.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개선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하루아침에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까지마음에 쌓인 시간들은 그만큼의 정성으로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믿고 기다리기로 한다.          



  


    선생님, 저 로운이에요.

  저는 엄마가 좋으면서도 무서워요. 엄마는 제가 할 일을 미루거나 안 하면 엄청 혼내요. 물건이 흐트러져 있거나 의자에 똑바로 앉아 있지 않아도 그래요. 동생이 어리광부리면 받아주는데 제가 그러면 의젓하게 굴라고 해요. 나도 어린데, 사랑받고 싶은데 안 그러니 속상해요. 다른 엄마들처럼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해주면 좋을 텐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사실 선생님께 바나나 필통을 던진 건 반장이 못 돼서가 아니에요. 엄마한테 칭찬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화난 거예요. 엄마가 잘할 때만 웃어주니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돼요. 

  제가 화를 내면 낼수록 선생님이 더 힘들어지고 친구들도 멀어진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에 놓이면 저도 모르게 폭발하고 말아요. 제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악마가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악마는 조용하고 평화로울 때는 튀어나오지 않아요. 

  그렇다고 마냥 저만 이해해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친구들은 어른이 아니라 저랑 같은 나이잖아요. 친구들이 저랑 놀다가도 슬슬 눈치를 볼 때가 있어요. 주로 내기를 할 때 그래요. 멈추면 되는데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상태라 쉽지 않아요. 화를 내고 나서도 언제 그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어요. 

  제가 유치원 다닐 때는 엄마가 그러지 않았어요. 아빠 사업이 힘들어지고 싸우는 날이 많아지면서 변한 것 같아요. 조그마한 일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닦달해서 집안 분위기가 얼어붙었어요. 군대에서는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야되잖아요? 우리 집은 군대가 아닌 데도 군대 같아요. 군대에서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하라는 대로 해야 해요. 명령이 먹히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으니까 그러겠죠.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안 그러면 난리가 나니까 억지로 하는 척해요. 그걸 어떻게 아는지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요. 화를 내는 것도 습관이라고 하는데 저도 그럴까요? 엄마가 화내는 모습을 자주 봐서 제가 옮은 걸까요?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불을 뿜어내고 학교에서는 제가 그래요. 불을 잡아먹는 해태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필요한 거죠. 

  제가 글씨를 잘 못 쓰는 거 아시죠? 천천히 쓰면 괜찮은데 시간이 없을 때는 지렁이처럼 쓴다는 거요. 엄마가 글씨를 바로잡는다며 옆에서 계속 고치라고 했어요. 글씨를 잘 쓰고 싶어도 소근육이 덜 발달돼서 그런다는 걸 모르고요. 그때마다 저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꾹꾹 눌러썼어요. 몇 분을 그러고 나면 손에서 힘이 쫙 빠져요. 나중에야 그걸 알고 포기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도 글씨 연습하느라 힘들었을 거예요. 

  저는 뭐든지 잘하고 싶어요. 신발 정리도 가방 정리도 공부도 남보다 잘하고 싶어요. 엄마한테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좋아서 하고 싶어요. 그럴 수 있도록 엄마가 알고 기다려줬으면 해요. 

  선생님, 저는 이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쩌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해로운 존재가 되었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 일인지 알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로운이는 두 개의 얼굴이지만 차차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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