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자가 0명입니다"
봄 시즌 독서 모임 중 또 하나를 마감했습니다. 한 명 있던 신청자마저 어제 오후에 개인 사정을 핑계로 취소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신청률 제로. 이번 시즌 모임 중 3개는 '다음 기회로'가 됐습니다.
두 달 전부터 공을 들였습니다. 7개 모임을 요일에 맞는 콘셉트와 테마로 기획했습니다. 정리된 자료를 참고로 AI의 도움을 받아 홍보문에 사용할 이미지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월 첫 주에 블로그와 동네 커뮤니티에 야심 차게 글을 올렸습니다. 속으로 내심 기대했습니다. 다들 봄바람 불면 책 한 권 읽고 싶어질 테니까요.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조회수는 바닥을 기었습니다. 스마트폰 새로고침 버튼을 닳도록 눌렀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 밤 아내가 물었습니다.
"독서모임 사람 좀 모였어? 이번 달부터 시작이라며."
표정 관리를 했습니다.
"어, 이번엔 홍보를 늦게 해서 그런가 영 저조하네."
아무 일 없는 척 헛기침을 하고 냉수를 한 잔 마셨습니다. 못 모은 걸 티 내면 참 없어 보이니까요.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들면 웬만한 일에는 상처받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꽤 어른이니까요. 맷집이 단단해진 줄 알았습니다. 철저한 착각이었습니다. 상처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파고듭니다. 겉 피부만 두꺼워졌을 뿐, 속살은 십 대 때와 똑같이 여리고 예민합니다. 지켜야 할 알량한 자존심만 커졌습니다. 작은 생채기에도 피가 철철 납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기획한 모임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뿐입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머리와 마음은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저녁 내내 기분이 바닥을 쳤습니다. 책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소용없었습니다.
'내가 모임 소개 글을 어렵게 썼나?', '사람들이 유료 모임이라 부담감이 있나, 비싼가?'
누가 대놓고 핀잔을 준 것도 아닌데 혼자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서글펐습니다. 별것 아닌 일에 종일 속을 끓이는 제 모습이 참 못났습니다.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나 혼자 피곤을 자초했습니다.
아지트로 나가 종일 모임 공고를 고치고, 모임 활성화를 위한 다른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해가 지고 나서 아무도 없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머리를 많이 굴려서 그런가 배도 많이 고파 부엌으로 갔습니다. 찬장을 열어 제일 구석에 박혀 있던 매운 라면을 하나 꺼냈습니다. 아내 표현 '맵찔이'로 입맛이 변한 뒤 입에 대지 않던 라면입니다. 냄비에 물을 올렸습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위안을 줍니다. 붉은 국물 위로 매캐한 냄새가 피어올랐습니다.
식탁에 혼자 앉아 면발을 건져 올렸습니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뜨거운 국물을 삼켰습니다. 맵고 짠 자극이 혀끝을 강타했습니다. 이마와 콧등에 땀이 맺혔습니다. 입안이 얼얼해지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은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맵고 뜨거운 감각만이 온몸을 지배했습니다.
국물까지 바닥을 비우고 나니 콧물이 찔끔 났습니다. 휴지로 코를 팽 풀었습니다. 찬물 한 잔을 들이켜고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뱉었습니다.
'유튜브 보느라 책을 안 읽는 시대 탓이지, 내 탓이냐. 안 오면 자기들 손해지.'
참 소박하고 지질합니다. 위로 방식치고는 볼품이 없습니다. 이런 작은 일탈이 나를 살렸습니다.
마음이 다쳤을 때 우리는 너무 어른스럽게 대처하려고 애를 씁니다. '빨리 털어내야 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시간도 다 지나갈 거야.' 온갖 좋은 말들로 상처를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곪은 상처에 연고를 들이붓는 격입니다. 상처는 덮어둔다고 낫지 않습니다. 진물을 빼내야 아뭅니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른이라는 가면을 잠시 벗어던지고 내 마음에 솔직해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쿨한 척은 남들 앞에서나 하면 됩니다. 나 혼자 있을 때만큼은 철저하게 내 편을 들어야 합니다. 라면 한 그릇에 땀을 쏟고 혼잣말을 뱉는 이 시간, 이게 내 마음을 치료하는 방식입니다.
마음이 베인 날, 무리해서 괜찮은 척하지 마십시오. 스스로에게 24시간의 '감정 허용 구역'을 열어주세요. 알아보니 괜찮은 방법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 일기장이나 빈 종이에 속마음을 필터 없이 적어보세요. 억울함, 부끄러움, 서운함을 활자로 모두 쏟아내세요. 시원하게 쏟아내고 박박 찢어서 버리세요. 흔적도 남기지 마세요. 쌓이고 묵힌 감정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겁니다.
둘째, 머리가 복잡할 땐 몸을 굴려야 합니다. 동네를 땀나게 뛰거나, 묵은 때를 벗겨내는 화장실 청소를 해 보세요. 안 쓰던 근육을 쓰고 땀을 쫙 빼세요. 샤워를 하며 찌꺼기가 씻겨 내려가는 걸 눈으로 확인하세요.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고전적 방법입니다.
셋째, 하루쯤은 다이어트, 건강 생각 다 내려놓으세요. 달고,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으로 뇌를 속여보는 겁니다. 평소라면 절대 먹지 않을 불량식품을 양껏 드세요. 맵고 짠 자극이 마음의 보약이 됩니다. 원효대사 해골바가지처럼 나쁜 음식도 해석하기 나름이 될 수 있습니다.
다 큰 어른이 이래도 되나 싶을 겁니다. 네, 됩니다. 밖에서는 점잖고 이성적인 신사로 살아야 하니, 집에서 혼자 있을 때라도 마음껏 툴툴거려야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억눌린 감정은 병이 되어 돌아옵니다.
매운 라면 국물에 씻겨 내려간 상처 자리를 더듬어 봅니다. 다만 아침엔 퉁퉁 부은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찬물 세수를 여러 번 해야겠습니다.
골라 두었던 책을 다시 읽어볼 생각입니다. 모임에 사람이 없으면 나 혼자 읽으면 됩니다. 세상의 반응이 내 가치를 깎아내릴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나만의 속도와 색깔로 계속 걸어가면 됩니다.
상처 입은 나를 토닥입니다. 정해 놓은 스케줄에 맞춰 일하면서 걱정 대신 진정하고 푹 자야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chriscreations